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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근 Mar 31. 2017

< 내 사랑 내 곁에 >

- 비와 그때 그 노래 -

나는 20대 중후반, 3년여의 시간을 고시원에서 보냈었다.


이른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녘까지 책만 보다 하루하루를 보내던 시절, 나는 ‘공부’와 ‘외로움’이라는 녀석들과 친해져야 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정지된 시간 속에서 살았던 것 같은 그때......

계절의 흐름과 사람들의 옷차림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사시사철 트레이닝 복 하나를 교복 삼아 입었었고, 하루 두 끼 식사는 단지 뇌에 포도당을 제공하기 위한 작업에 불과했었다.


고시원 계단 중간, 재떨이가 마련된 그곳의 창문은 나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투명한 벽 같았고, 그 유리 창살의 감옥에서 바라본 세상은 생경하고도 부러움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멋들어진 양복에 브리프 케이스를 든 직장인, 환한 미소로 서로를 바라보며 다정히 손잡고 가는 연인들, 어딘가를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그 모든 이들이 나와는 다른 시공간에 사는 사람들 같았고 나는 고시원 계단 창문을 통해 그 세계를 엿보는 관망자 같은 존재로 느껴졌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봄을 재촉하던 비가 무심히 내리던 밤이었다.

1평 남짓의 고시원 방안에 달린 A4용지 반만 한 크기의 창문에도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날씨의 변화에도 무덤덤했던 그때였지만 그 날은 왠지 빗방울을 느껴보고 싶은 생각에 창문을 열고 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한 체로 한참이나 빗방울의 자유낙하를 손으로 느끼던 그때......

찬 밤공기의 서늘함을 실은 빗물의 차가움이 온몸으로 전해지던 그때......


어른 머리통 하나 들이밀기도 힘든 그 작은 창문을 통해 본 그때의 바깥 모습은 하늘로부터 흘러내린 슬픔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할로겐 가로등의 오렌지 빛 조명 위로 뿌려지던 무심한 빗방울들과 맞은편 가게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으시던 아저씨, 그리고 우산도 없이 차가운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고개를 푹 숙인 체 힘없이 걸어가던 어떤 대학생......


무채색의 우울한 그림 같았던 그 모습들을 취한 듯 멍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FM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에 목 언저리가 메여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전주에 흐르던 구슬픈 바이올린 선율은 어두운 밤, 교회 십자가보다도 더 붉게 달궈진 인두로 내 가슴을 지지는 듯했고, 세상의 모든 시름과 고통을 견뎌낸 듯한 가수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노래 가사와는 상관없이 그 음색만으로 “나도 안다. 나도 견뎌봤다. 안다... 안다...”라고 말하며 날 위로해 주는 듯했다.


창문 밖 모습의 우울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동안 내 안에 쌓였었던 그 어떤 것들 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나는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하염없이 울었다.


‘눈물’이란 존재를 잊고 살만한 풍파들을 겪었음에도 그 날 나는 울음을 참으려 하지도 않고 마냥 울었다.

마치 그동안 이겨내려고 애써왔던 내 안의 ‘슬픔’이란 존재에게 무릎 꿇어 버린 한없이 나약한 모습으로, 슬픔이란 녀석에게 온전히 나 자신을 맡겨 버렸었다.


또다시 간주 부분에 연주되는 구슬픈 바이올린 선율, 그리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수의 목소리......

빗방울은 여전히 가로등 불빛에 진주알처럼 부서지고 있었고, 마치 피아노 건반 위에서 춤추는 피아니스트의 현란한 손가락 움직임처럼 방울방울들이 내 손바닥을 가볍게 건드려 주었던 그 밤......

.

.

.

며칠 전, 봄 비 내리던 어느 날.


얼큰하게 취하신 중년의 아저씨가 비틀비틀 거리며 옛 슬픔을 떠올리게 하는 그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셨다.

그 아저씨는 어떤 슬픔을 만나셨기에 우산도 없이 차가운 비를 맞으며 그 노래를 부르셨을까?

노래 중간중간 추임새처럼 내쉬는 그분의 한숨 속에서 삶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아저씨의 취한 가락에 올라오던 옛 슬픔......

그때보다는 수 십배 커진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방울을 느껴본다.


3월 의 빗방울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리고 그 노래도 여전히 슬펐다.



* 사진 : 구글 이미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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