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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근 Dec 29. 2023

< Sad Christmas >

- 선의(善意)와 동정(同情)과 오해 -

4, 5년 전쯤이었다.


나는 조카들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마트 장난감 코너를 돌고 있었다.

장난감 코너는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온 아이들로 붐볐다.

아침 신문을 정독하는 아버지의 눈빛으로 진지하게 장난감을 고르던 아이가 있었던가 하면 장난감을 양손에 잔뜩 쥐고도 또 다른 장난감을 사달라 조르는 놀부 같은 아이도 있었고 뭔가 자신에 마음에 맞지 않았는지 주저앉아 칭얼대는 깽판형 아이도 있었고, "꼭 하나만 사는 거야!"라는 엄마의 당부를 마치 집문서 계약하듯 신중하게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는 아이도 있었다.


어린이날보다 더 어린이를 위한 날, 그날이 바로 크리스마스 아닌가 다시 한번 생각게 만드는 일상의 풍경이었다.


그렇게 그 자리의 모든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을 때 나는 한 어린 사내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행색이 초라하다는 말조차 무색할 정도였던 한 부부가 미는 쇼핑카트에 타고 있던 아이는 그나마 초라한 행색에서 겨우 벗어난 모습이었다.


너무나 대비되는 눈빛.

다른 아이들이 행복과 희망과 기대와 즐거움의 눈빛으로 그 공간 안에서 개인의 소유욕을 채우고 있을 때, 그 아이만큼은 무채색의 기운으로 카트 안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눈치 없는 사람이 보더라도

'아... 갖고 싶다.'라는......

'여기 있는 아이들이 부럽다'라는...... 감정이 읽히는 아이의 눈빛 그 심연엔

'절대로... 입 밖으로 사달라는 소리를 해서는 안된다'라는......

'엄마와 아빠에게 내가 장난감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을 들켜서는 안 된다'라는......  무거운 침묵이 있었다.


'넌 대체 어떤 인생을 살고 있길래 겨우 예닐곱 살 먹은 아이가 그런 눈빛을 가질 수 있는 거니......'

도저히 그 나이 대에 나올 수 없는, 아니 웬만큼 세상풍파 겪어온 어른들도 낼 수 없는 무겁고도 깊은 눈빛과 태도를 그 아이는 갖고 있었다.


갖고 싶은 장난감들과 장난감을 가진 아이들을 무색(無色)의 무거운 눈길로 바라보던 아이는 어느덧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얼른 아이의 눈길을 피했다.

꾹꾹 눌러 참고 있는 아이의 마음을 내가 눈치챘다는 게 들켜선 안될 것 같았다.

그 어린아이가 죽을힘을 다해 인내하고 있는 힘듦의 시간에 내가 끼어들어선 안될 것 같았다.

왠지 내 속마음이 들키는 순간 그 아이에게 '넌 지금 힘든 환경에 있는 게 맞아!'라고 확답을 던져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아이의 눈길이 나에게서 장난감으로 향했다.

아이는 그 장난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한 장난감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밀려나가는 카트 위에서 고개가 옆으로 다 젖혀질 때까지 그 장난감만을 바라보았다.

정말 갖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이를 실은 카트가 장난감 코너를 벗어나 사라져 갔다.

여전히 장난감 코너에 남아있던 아이들은 그 나이대의 자연스러움으로 각자의 물욕(物慾) 채우기에 여념 없었다.


나는 잠깐 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머릿속이 온통 그 아이의 무거운 까만 눈동자로 가득 차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날 조카들의 선물사는 것을 관두고 마트 바깥으로 나왔다.

밖은 함박눈 실은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한동안 무작정 걸었다. 아니 무작정 걸을 수밖에 없었다.

흰 눈 위에 찍히는 나의 까만 발자국조차 아이의 눈동자 같았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주문한 따뜻한 차 한잔을 내려다보며 아이에 대한 생각을 갈무리할 때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흔한 아들에 대한 안부전화였다.


"엄마, 실은......"


나는 어머니와 통화하던 중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랬구나. 원래 그렇게 힘든 환경에서 사는 아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철이 일찍 든단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 아이는 아이답게 크는 게... 그게 제일 예쁜 건데... 에휴......"


어머니께서도 그 아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셨다.


"아들아... 실은 나도 며칠 전에......"


어머니께선 자신도 삼사일 전에 나와 비슷한 일을 겪으셨다고 했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가신 어머니께서 떡국에 넣을 만두를 고르고 계셨는데, 행색이 남루하기 그지없는 한 부부가 조그마한 어린 여자아이를 카트에 태우고 왔다고 한다.

그런데 카트 안의 그 여자아이가 만두를 보고 너무 먹고 싶다는 눈빛을 지었는데 자신의 부모들을 쓱 한번 보더니 그 눈빛을 거두더라는 거였다.

심지어 그 아이는 어머니가 보시기에 네다섯 살 정도로 밖에 안보였다고 하셨다.


"하......"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아이의 눈빛이 너무 마음에 걸려서 만두 한 봉지 사서 얼른 그 부모에게 전해줄까 하다 말았다..."

"왜요?"

"혹여 나는 그런 뜻이 아닌데 그들이 받아들이기에 값싼 동정처럼 느껴질까봐 주저하게 되더구나.

 몇 번을 만두봉지를 들었다 놨다 했는지......

 내가 건넨 선의(善意)가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결례(缺禮)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 아이의 눈빛이 마음에 걸려서 나도 그날 하루 종일 마음이 좋지 않았단다."


어머니와 통화를 마치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선의와 동정의 구분, 받아들이는 이들의 오해, 그리고 가난......

지금도 그때의 내가 장난감을 사서 아이에게 주는 게 맞았을지 아니면 그때처럼 모른 척하는 게 맞았을지 혹은 어머니가 만두를 그 아이에게 건네는 게 맞았을지 아니면 그때처럼 관두는 게 나았을지... 어떤 게 더 나은 행동이었는지 결론 내리지 못했다.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어머니와 나처럼 언제든 '줄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줄 마음'들이 모이고 모이면 가난을 구제는 못하더라도 가난의 비참함은 피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모 시인은 말했다.

'가난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지만 그건 한낱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 말이다.

가난은 단지 남루 정도로 표현될 수 있는 가벼운 녀석 아니다.


가난은 비정할 정도로 잔인한 녀석이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는......


매해 돌아오는 성탄절이 되면 나는 그 아이의 무거운 까만 눈동자가 생각난다.

그리고 어머니가 말했던 그 여자아이도 함께 생각해 본다.


"만약 정말 산타가 있다면 잊지 마시고 꼭 그 아이들의 집에 들러주시길......

 그리고 그 아이들이 올해는 작년보다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성탄절 보내길......"


해마다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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