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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근 Dec 27. 2023

< 첫사랑, 그리고 첫 키스의 향기 4 >

- 낙인(烙印) -

노래하는 동안 나의 시선은 그녀만을 쫓았고, 노래 듣는 동안 그녀의 시선은 나만을 쫓았다.


암흑의 공간 가운데 밝혀진 촛불처럼 수많은 사람 가운데 오직 그녀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특히 날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은 아침햇살 받은 동해의 윤슬처럼 반짝이고 일렁거렸다.


노래를 마치자 우리 일행 외의 다른 테이블에서도 박수가 쏟아졌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와 일행들의 테이블로 돌아올 때까지 그녀의 시선은 나만을 향했다.

그리고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말했다.


"넌 노래도 잘하는구나."

"내가 원래 잡기(雜技)에 능해."


내 친구들이야 전부터 내 노래를 자주 들어봤으니 별반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그녀의 친구들은 달랐다.

모두 한 두 마디씩 칭찬을 건넸다.

그리고 그녀들의 칭찬이 이어질 때마다 J의 표정에서 뿌듯함을 읽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모든 사람들의 노래가 끝나고 순위를 발표하는 시간.

어떻게 운이 좋았는지 그날 1등은 나에게 주어졌다.

상품으로는 양주와 다음에 그 술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 5만 원권을 받았다.

큰 상품은 아니더라도 공것이 생겼으니 기분은 좋았다.

양주는 그 자리에서 일행들과 나눠 마시며 기분 좋게 취하고 즐겼다.


자리를 옮기기 전 계산을 하려는데 선배가 나서며 날 극구 말렸다.

"사내들끼리 낯 간지럽게 선물 주고받는 건 못하겠고 대신 술값으로 퉁치자.

 그리고 둘이 잘 어울린다. 예쁘게 잘 사겨라. 알았냐 후배야?"

선배는 내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항상 가벼운 듯하면서도 한 번씩 형 다운 모습을 보이는 선배였다.

'하... 참 미워할 수 없는 형...'


우리는 그 자리를 파하고 3차로 노래방을 갔다. (2차, 3차, n차 논다고 뭐라고 하지 마시라. 혈기 방장'했던' 스무 살 아니던가? 지금은 저렇게 놀라고 등 떠밀어도 못 노니......)

무대 위 한곡으로는 부족했던 나는 자신 있는 노래 몇 곡을 더 불렀고 친구들의 소란 중에도 내가 노래하는 동안 그녀의 눈동자는 날 보며 반짝였다.


적당히 취기 오른 친구들은 각자 김경호, 서문탁, 소찬휘, 박완규, 신성우, 엄정화에 빙의돼서 노래를 불렀다.

친구들이 굿판을 벌이는 사이 그녀와 나는 자리 구석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오래전 일이라 그때 무슨 말을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만 우리는 대화하는 동안 참 많이 웃었고, 참 많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 이 아이가 이렇게 생겼었구나......'

사귀는 동안 참 많이 만나고 많이 본 얼굴이었지만 그날따라 그녀의 모습이 사뭇 달라 보였다.

뭐랄까.

늘 보던 경치나 사물도 어떤 계기나 사건을 통해 다르게 인식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그 입맞춤 이후 그녀는 나의 가슴에  조금씩 새롭게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친구들의 푸닥거리가 끝나고 우리는 각자 집으로 향했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짝들의 집까지 택시로 바래다주었고 나 또한 그녀의 집까지 함께 했다.

그녀의 집까지 가는 동안 그 해의 첫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그녀의 집 앞까지 함께 소복이 쌓인 눈을 밟으며 걷는 동안 나는 말했다.


"오늘 너무 고마웠어. 실은 나 이런 생일축하 처음 받아 봤거든...

 아마 내 평생 기억될 하루가 된 것 같아.

 아! 그리고 선물... 진짜 고마워."


나는 그녀가 선물한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고맙긴... 더 좋은 선물 해주고 싶었는데... 선물이 너무 작아서 미안하네."

"에이... 이게 작긴 뭐가 작냐? 1년 내내 뿌리고 다녀도 다 못 쓰겠는데...... 그리고... 그... 또... 다른 선물도 받았잖아..."

"뭐? 편지?"

"아니... 그... 음...... 뽀뽀..."

"풉!"

"풉!"


우린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으... 춥다. 그치?"


나는 내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벗어 그녀의 목에 둘러주었다.


"괜찮은데......"

"귀도 시리겠다."


혹시 그녀가 추위를 타지 않을까 싶어 그녀의 긴 생머리 사이에 숨은 그녀의 두 귀에 따뜻한 내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 속에 박힌 동해바다의 윤슬들이 할로겐 가로등 조명을 받아 흔들리고 있었다.


내 입술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가 닿았다.

다시 한번 그녀의 사과향이 내 정신(精神)과 전신(全身)을 휘감았고, 우리는 다시 무중력 공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신(神)이 인간에게만 주신 따뜻한 감정들이 서로 맞닿은 입술을 통해, 서로 맞닿은 가슴을 통해 이어지고 또 이어져 갔다.


하늘에선 달빛에 취한 눈들이 우리들의 머리와 어깨에 조용히 쌓이고 있었고,

사위(四圍)의 적막 안으론 저 멀리 예배당의 종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 끝 -



* 에필로그 *


그녀와의 첫 키스 이후 언젠가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 실은 그때가 내 첫 키스였어."


그녀는 잠시 머뭇하더니 말했다.


"나도......"

"진짜? 나는 그때 네가 너무 차분하고 담담하길래 좀 경험이 있었나? 싶었는데..."

"뭐라구!!!"


그녀의 설명을 이랬다.

자신도 키스에 대한 경험이 없었는데 날 만나면서 만약 키스를 하게 된다면 '아... 이 사람과 하게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아무런 예비동작(?) 없이, 깜빡이도 안 켜고 바로 들입다 급발진하는 날 보면서 처음엔 밀어낼까 싶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자신도 그렇게 돼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집 앞에서의 두 번째 키스 이후엔 '내 첫 키스가 저 사람이라 행복하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도... 나도 내 첫 키스가 너라서 행복해."

.

.

.

+ 벌써 20년도 훨씬 지난 일들이 겨울이 되면, 내 생일쯤 되면, 그때 불렀던 노래들이 들리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럴 때면

'그 아이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간호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아인데 지금은 간호사가 됐을까?'

'이젠 한 남편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가 됐겠지?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하고 궁금증이 일어난다.


적지 않은 나이를 먹는 동안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물론 나 또한 그들에게 그렇겠지만......)

하지만 내 첫사랑... 내 첫 키스의 상대였던 'J'에 대한 기억만큼은 시간의 흐름과 망각이라는 풍화작용에도 내 가슴속에 진하고 강하게 남아있다.


그 이유는 아마

모든 것이 처음이라는 것에서 왔던 서툴음이 우리에게 엉뚱하고 즐거운 일들을 만들었고

또 처음이기에 하릴없이 느껴졌던 두려움이 서로에 대한 긴장과 떨림을 만들었으며

무엇보다 스무 살, 우리들의 순수함이 서로에 대한 솔직함과 상대만을 올곧게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들을 만들었기에 인생이란 강물의 큰 흐름 속에서도 그때의 그 기억만큼은 굳건히 내 마음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녀'였기에...

유한한 인생이라는 시간선상 위에서 첫사랑이란 공란이 그녀로 채워졌기에...

다른 사람도 아닌 오직 '그녀'... 'J'였기에 그렇지 않나 여겨진다.


모 드라마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사랑을 '화석'으로 비유했었다.

나는 그녀와의 사랑을 '낙인(烙印)'으로 비유하고 싶다.


'넌 내 거다'라는 소유의 증표로써의 낙인이 아닌,

말랑말랑했던 순수한 가슴에 사랑한 만큼 깊고 깊게 패인 낙인.

언젠가 그 상처를 쓸어보며 추억에 잠기게 만드는 그런 낙인.

절대로 지워지지도 또 절대로 지우고 싶지 않은 그런 낙인.

그녀는 나에게 그런 낙인 같은 사람으로 남아있다.


하늘에선 그녀와의 첫 키스를 축복하던 때만큼이나 아름다운 눈송이들이 흩날리고,

뜨거운 커피잔으로 별들의 마음 닮은 그것들이 떨어져 내리는 내 생일의 밤.

그 옛날 아름다웠던 그녀와 그녀와의 추억을 되살려 본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어떤 모습이든 그녀가 행복하길 저 달님께 빌어본다.


- 진짜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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