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가 터진 2020년 4월,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무려 4개월 동안 나를 붙잡아둔 프라하의 동화 같은 풍경과 끝내주는 맥주를 꼭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 준비한 여행이었다. 우리는 그 여행을 위해 태어나서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막대한 돈을 썼다. 런던에 도착해서 셰익스피어가 자주 갔다는 500년인가 된 펍에서 캐스크 비어를 마시고 할슈타트 오버트라운 호수가 보이는 숙소에서 며칠을 보내고 부다페스트에서 지인의 오페라를 보고 크로아티아로 넘어가 옥빛이 감도는 프라이빗 비치에서 수영을 하고 프라하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돌아오는 3주간의 화려한 일정을 짰다. 각지에 숙소는 물론 기차표까지 모두 끊어둔 상태에서 코로나가 터졌다. 모두 취소되었다.
코로나가 터진 이후 당연히 일도 줄었다. 이따금 들어오던 공연이나 행사가 모두 취소되었고 급할 때면 찾아가 일할 수 있던 계약직 일자리도 도무지 구할 수 없었다. 적어도 코로나가 막 시작된 2020년에는 수입이 딱 절반으로 끊겼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여행 취소로 인해 환불받은 돈으로 생활했다. 야금야금 쓰다 보니 1년 치 생활비가 나왔다. 2021년부터는 태세가 조금씩 안정되면서 조금씩 다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첫 정규 앨범을 발매하고 공연도 조금씩 늘었다. 그렇게 작년까지, 우리 각자는 다시 일할 수 있게 됨에 그저 감사하며 여행 일랑 꾹 잊고 지냈다. 그러다 2023년이 도래하니 솔솔 여행 생각들이 났다. 다시 유럽여행을 계획했지만, 전 세계에서 여행이 다시 재게 된 시점에 인기만점 여행지인 유럽은 비행기 티켓도 숙소 물가도 껑충 뛰어올랐다. 3년 전 예약했던 숙소 중 숙박비가 두 배나 오른 곳도 있었다. 개다가 (감사하게도 각자 안정된 일자리에 자리 잡은) 우리가 낼 수 있는 최대 휴가는 추석 연휴를 포함한 10일뿐이라 유럽까지 가는 것도 적잖은 부담이었다. 그래서 오게 되었다. 교토.
교토에서 보낸 첫날은 비가 무지 많이 내렸다. 굵은 빗줄기가 후두두두 했지만 으스스하지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최적의 온도 속에서 우리는 우산을 쓰고 한 시간을 내리 걸어 다녔다. 교토에서 최고로 유명하다는 노포 스시집 문 앞에 참새처럼 쪼로록 서서 또 한 시간을 기다렸다. 주문한 스시를 한 입 먹자마자 이번엔 개구리처럼 눈이 크게 떠졌다. 회와 밥과 입안의 온도가 정확히 같게 느껴지는, 와사비 양이 너무나 절묘해서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산뜻한 향이 은은히 감도는, 전반적으로 식감이 매우 부드러워 몇 번 씹지도 않은 것 같은데 꿀떡 넘어가버리는 이 완벽한 스시를 먹고서 우리는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한 손으로 배를 두드리며 박자감 있게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엔 호텔에 있는 대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건식 사우나에 땀을 뺐다. 사우나와 이어진 근사한 라운지에서 세상 맛있는 생맥주로 위장을 식혔다. ‘아이고 좋다. 아이고 좋다’를 남발하면서.
교토는 시내 중심에 큰 강이 있는 고즈넉한 도시이다. 강 외에도 곳곳에 하천과 나무가 있고 거의 모든 집은 검은색 기와가 얹어진 세모난 지붕을 가졌다. 외벽은 가로가 3센티 정도 되는 길고 얇은 나무살이 촘촘히 둘러져있거나 발을 걸어둔 곳이 많다. 100년 된 집은 명함도 못 내민다는 이곳은 1000년 된 찻집이 있을 만큼 시간을 두고 볼 줄 아는 도시다. 미닫이로 된 출입문에는 큰 글자로 무언가 써넣은 리넨을 걸어두는 곳. 좁은 골목에도 자전거를 위한 30센티 너비의 핑크색 차선이 마련되어 있는 곳. 현지에서 기른 채소요리가 있는 곳.(단지 찌거나 굽는 정도로도 훌륭한 요리가 된다.) 달큼한 간장 소스가 입맛을 쪽쪽 다시게 하는 곳. 주민들은 약속한 듯 조용하고 아이들은 그림처럼 귀엽고 자동차가 천천히 달리는 곳. 보는 풍경 모두에 미소가 끊이질 않는 곳. 교토는 그런 곳이었다.
다만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카페를 찾기 어려워서 본의 아니게 아침마다 한두 시간 산책을 해야 했지만, 교토를 떠나는 오늘에야 7시에 문을 여는 카페를 발견했다. 프린트해 온 이기호의 단편을 읽으며 친절한 커피를 마신다. 창밖에는 걸음이 너무 느려서 슬로모션 영상을 보는 것 같은 할머니와 강아지가 나란히 지나간다. 파랗고 드높은 하늘에는 구름이 둥둥둥 가을을 외운다.
350년 된 문방구에서 산 수첩과 연필, 나도 모르게 사버린 친했던 고양이가 그려진 엽서 얘기도 조만간 모두 풀어봐야겠다. 끝내주는 맥주 이야기도.
교토에서의 마지막 아침은 이렇게 보낸다. 오늘은 오사카로 간다. 오사카도 기대가 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교토, 몇 십 년이 지나도 그대로 있을 것 같은 이 그림 같은 풍경이 영영 그리울 거야. 언제든 다시 오면 되지만, 처음은 처음 밖에 없으니까. 교토의 처음은 이토록 성공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