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세 모녀는 성격도 취향도 제각각 다르지만 역할 분담이 확실하기에 큰 문제없이 상생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우선 엄마는 진심으로 사람을 좋아한다. 사회적인 제스처로서가 아닌 '정 나누기'를 즐기는 타입이다. 즐거움 속에서 큰 소리로 웃고 슬픔 속에서 금방 눈물을 흘리는 일등 공감러. 엄마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감정 표현이 즉각적이고 확실하기 때문인 것 같다. 엄마의 무례하지 않은 선의 솔직한 감정표현은 그를 대하는 사람도 그 자신도 무언가 마음에 꽁꽁 담아두는 일이 잘 없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서운할 때는 다만 자리를 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감정 표현이 된다는 걸 아시는 세련된 사람이다. 엄마는 좀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오래 담아두는 일이 없다. 불필요한 것은 신기하리만치 금방 잊어버린다. 고마운 일이 생기면 손뜨개로 만든 가방을 선물하기도 하고, 이사 가는 친구에게는 전자레인지를 보내주기도 하고, 입맛을 쩝 다시면서 값이 비싸서 본인도 쓰지 못하는 고급 식기 세트를 선물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엄마가 가진 ‘정감’을 실감한다. 그런 마음은 돌고 돈다. 그래서 항상 우리 집에는 이웃집에서 가져다준 각종 구황작물과 과일, 쌀, 빵 등이 넘쳐난다.
막내인 유나는 꼼꼼하고 일을 미루는 법이 없는 우리 집 총무이다. 각종 세금신고, 정부 혜택, 보험, 적금 등 세무 관련 정보는 가족 모두가 유나에게 의지한다. 유나는 어릴 적부터 큐브를 잘하고 드럼도 배웠다.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성격이 총무로 딱이다. 그렇다고 즉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놀고 싶으면 놀아야 하는 것도 딱 떨어지는 경험의 일종일까? 유나는 정말 잘 놀고 잘 마시고 잘 웃는다. 그는 막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이 되는 존재인데 어쩌다 가장 가장(家長) 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기특한 멤버다. 유나는 함부로 친절을 남발하지 않는다. 무례한 사람 앞에서는 남녀노소를 불사하고 정색을 날린다. 자기 권리를 챙길 줄 알고 미용실에서도 용감하게 협상한다. 그런데 유나의 마음에 한 번 들어가게 되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끝이란 없는 끈기 있는 친절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특혜는 정말 특혜라고 느껴질 만큼 엄청난 안도감과 기쁨을 준다. 유나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을 초대해서 자주 쿠키를 구워준다. 누구에게 무언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기꺼이 문고리에 걸어두고 오는 정성을 쏟는다. 내가 마음이 우울하다고 말하면 꽃을 보내주고, 자다가 다리에 쥐가 나면 벌떡 일어나서 물주머니를 데워준다.
나는 우리 셋 중에 가장 눈치가 빠르고 웃기는 짓을 잘한다. 나는 주로 감정을 담당하는데, 이것이 양면의 날이 있는 것이 내가 즐거우면 모두가 즐거운 대신에 내가 예민하면 모두가 침울해진다. 따라서 스스로의 감정만 잘 유지한다면 언제나 웃음이 넘치는 화목한 분위기가 가능하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잘한다. 나는 엄마와 유나를 자주 안아준다. 나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의 정성을 다 하여 요리한다. 화장실 청소를 반짝반짝 잘한다. 무엇이던 좋은 게 있으면 함께 하고 싶어 한다.(예를 들어 좋아하는 수제맥주 집에서 셋이 고스톱을 치며 맥주를 마신적이 있다. 그곳은 힙합음악이 흘러나오고 힙피플이 즐비한 곳인지라 세 모녀가 등장하여 우리 식대로 노는 모습은 그들에게 주목받기 충분했다. 하지만 어쩌랴, 좋은 건 같이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을) 하지만 나는 그야말로 헐렁한 인간이다.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놔서 유나와 엄마한테 혼난다. 둘은 나의 동선을 나의 어질러짐으로 확인할 수 있다. 얘가 여기서 자다가 여기서 먹고 여기서 벗고 여기서 입어보고 이게 아니라서 다른 걸 입어보고 무언가를 결정해서 입고 나갔군. 알아채고는 호되게 혼낸다. 엄마는 '이거 또 신잔디 짓이구만 ㅉㅉ'. 유나는 '언니, 이리 와봐.' 한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나는 역할을 확실히 한다. 그건 바로 웃음이다. 퍼허허허 알았어 알았숴~~! 하면 다들 웃고 만다.
솔직하고 정이 많은 엄마, 똑 부러지고 멘탈이 강한 막내, 웃기고 사랑을 잘 표현하는 나. 이 셋은 각자의 역할을 잘 이행할 때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한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다. 우리도 물론 싸우고 울고 불고 때로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곤 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함께 살아간다. 이제 보니 함께 잘 사는 비결은 역할을 잘 인식하는 것 같다. 침범하는 사람에게 적절히 침범당해주고 침범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침범을 참아주고. 이것도 역할의 일종이라고 하면 그렇겠다.
오늘을 소중히, 제 역할을 다하면서 지내면 그만이다. 어제 막걸리를 거하게 마시고 엄마와 다투었다. 아침에 일어나 ‘사랑해~’하고 서로를 안아주었다. 한 집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좀 그래야 하는 것 같다. 먼저 안아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해도 전혀 손해는 아니라는 마음가짐. 각자 역할에 충실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