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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디 Dec 04. 2023

일기는 아침에

 해가 지면 이상하리만치 감상적이 된다. 올해 초, 꾸준히 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했을 때 하루 일과를 정리하자니 늦은 밤 자기 전 시간이 적당하다 판단했다. 그런데 자꾸만 일기를 쓰면서 내가 겪은 상황과 느꼈던 감정을 각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드라마를 만들고 있었다. 어쩌다 일기 파일을 쭉 열어보자면 ‘내가 그날 정말 이렇게 느꼈었나? 그때 나는 분명 꽤 불쾌했던 거 같은데.’ ‘왜 내가 잘못한 것 마냥 써 놓았지? 오히려 난 해야 할 말도 못 했는걸!’ 하는 적도 빈번했다. 반대로 분명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들이었음 에도 어쩐지 그날 일기에 기쁨이 꽉 차게 담겨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멜랑콜리한 뉘앙스’가 모든 일기에 덧칠되어 있었다. 모든 사람은 그럴싸했고 모든 날에 무슨 서사가 있었다. 삶이 어찌 그럴 수만 있는가. 가짜 일기였다. 개선이 필요했다. 좀 더 솔직하게 써보고자 남의 이야기인 양 내 이름에 이니셜을 붙여서 소설처럼 써보기도 하고, 육하원칙이 잘 들어가 있는지 신경 쓰며 써 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다음날, 또 그다음 날 보면 ‘이거 아닌데…’ 했다.


 한때는 밤에 가사를 써 보기도 했다. 밤에 쓴 가사를 들여다보면 나조차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숨겨진 의미를 해석하고 솔직하게 드러내 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런 과정은 대부분 아침에 이루어졌다. 밤에 쓰고 아침에 수정하는 일종의 프로세스가 지치기 시작한 건 여름 즈음부터다. 가사는 물론, 일기도 안 쓰기 시작했다. 스스로 별로라고 생각되니, 점점 하기가 싫어졌다. 선배들께 용기를 얻어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한 타이밍이 우연히 아침 시간이었는데, 술술 잘 써지기도 하고 전 날 느낀 사건과 감정이 그대로 적혀 들어갔다. 이후로는 아침에 일기를 쓴다. A4 한 장을 꽉 채워보자는 목표도 수정했다. 단 몇 문장만 쓰고 싶은 날에는 그렇게 했다. 이를테면,



2023. 0월 0일

 오늘은 연습도 하지 않고 누워서 지냈다. 갑자기 아기곰에 꽂혀서 아기곰 영상만 찾아봤다. 육개장 사발면에 흰 밥을 지어 함께 먹었다. -끝-



 그렇게 한 계절 정도를 아침 일기를 쓰며 겨울 즘 되니(이쯤 되니) 일기가 점점 자세해지고 감정도 더 고스란히 담기게 되었다. 되도록 ‘내일은 이렇게 해야겠다. 앞으로 이렇게 해야겠다.’ 같은 미래 중심의 맺음은 하지 않으려 애쓴다. 썼다가도 지운다. 단지 어제 일어난 일에만 집중했고, 특히 느꼈던 감정을 더듬고 더듬어 자세히 남겨본다. 그러고 나면 약간 개운한 기분이 든다. 무언가 하나를 잘 끝낸 기분으로 아침을 시작하니, 마음 운동이 된다. 아주 조금씩, 대범해지는 것 같고 아주 조금씩 섬세해지는 것도 같다. 몸이 아픈날에도 아침 일기는 꼬박꼬박 써보려고 노력한다.


 겨울엔 해가 일찍 지고 밤이 얼른 찾아온다. 유달리 마음이 약해지고 감상적이 된다. 그래서 요즘 아침 일기를 빼먹지 않으려 더더욱 애쓴다. 연말로 접어드니 종종 한 해 겪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엄습하여 축축 쳐진다. 슬프거나 외로운 기분이 드는 밤에는 감사한 사람들과 감사한 순간들을 최대한 자세하게 떠올리려 노력한다. 바로 그때, 아침에 쓴 일기들은 큰 도움이 된다. 올해 이런저런 일들로 혼자서 많이 울었다. 하지만 감사했던 날의 일기를 들춰보니 흘린 눈물이 조금씩 주워 담아지는 기분이 든다. 차츰 다시 벅차고, 재밌게 잘 살고만 싶어 진다. 언젠가 기쁨의 눈물(그리고 멈추지 않던 굵은 콧물)이라는 제목으로 일기를 묶어두고 싶다. 사는 게 아프고 쓸쓸해도, 그만큼 기뻐할 이유 또한 충분하다는 사실을 자국 내어 남기고 싶은 것이다.


 해가 지면 이상하리만치 감상적이 된다. 그때는 아침에 쓴 일기를 읽어보면 참 좋다. 하루 끝에 쪼그라져 있는 내게, 등을 곧게 편 내가 말을 걸어준다. 건강하게 살자고, 원래 사는 게 자신 없을 때가 더 많은 거라고, 그래도 ‘우리 잔디씨, 감기라도 걸릴까봐 걱정해’ 주는 감사한 아군들이 너는 곁에 있지 않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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