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잔디 Dec 20. 2023

눈사람 만들기

 여동생과 나는 비어있는 집 앞 주차장에 곱게 쌓인 눈을 발견하고 펄쩍 뛰었다. 유나가 ‘언니, 어서 나와봐! 눈이 엄청 쌓였어! 차도 없어!’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사슴처럼 검고 둥글고 광택이 나는 눈동자와 동동 구르는 발사위를 보자니 함께 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 그래?’ 하고 시큰둥 반응했다가는 금세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게 뻔하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진짱???’ 하고는 유나를 따라 나갔다. 아직도 새끼손가락 끝 마디 정도로 굵은 눈이 눈으로 따라 볼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 집은 벽돌로 마감된 30살이 훌쩍 넘은 다세대 주택으로 경차를 딱 한 대만 세울 수 있다. 원래는 옆집에 사는 아저씨가 쉐보레 스파크 차량을 대어두던 자리가 그날은 비어있던 것이다. 옆집 아저씨는 눈이 내리면 항상 제일 먼저 나가 공동현관 앞에 쌓인 눈을 쓸고 이따금 음식물쓰레기통을 세척해주기도 하시는 아주 고마운 이웃이었다. 우리는 도저히 아저씨만큼 발 빠르지 못했으므로 잡채나 김치, 찐빵, 부침개 따위를 만들어 자주 나눠먹었다. 옆집 외에도 우리 빌라는 이웃정이 돈독한 편이다. 꼭대기 층에 사는 집주인 부부는 명절 때면 과일을 조금씩 문고리에 걸어두기도 하고, 감자나 고구마 같은 작물을 현관에 쌓아두고 나눠먹자고 단톡을 보내시기도 한다. 2층은 아이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서 자주 목놓아 노래를 부르는데 그래서인지 어머니가 가끔 ‘시끄럽죠..?’하면서 떡이나 곶감을 돌리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봄여름이 되면 꽃이나 선인장 화분을 공동현관에 늘어놓고 키운다. 예쁜 것은 같이 봐야 좋다면서. 이 나이 먹은 벽돌 주택 안쪽에서 칸칸이, 층층이 나누어지는 자잘한 정은 각종 누수와 결로와 홍수마저 겪고도 이 집을 못 떠나게 한다. 아무튼 눈이 소복 쌓여있는 텅 빈 주차장을 보면서 우리는 옆 집 차가 들어오면 이 많은 눈들이 더 이상 우리 소관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눈을 마주쳤다. 당장 고무장갑 두 개를 챙겨 나와 눈을 모으기 시작했다. 옷에 옷에 옷을 껴입고 깔깔거리면서 유나는 머리를 나는 몸통을 빚었다. 엄마 반짇고리를 뒤져 단추로 눈을 붙이고 나뭇가지로 팔도 만들고 안 쓰던 털모자까지 찾아서 씌워주었다. 코가 빨개진 우리는 눈사람을 가운데 두고 사진을 찍었다. 이후로 눈이 내릴 때면 매일매일 그날을 떠올린다.


 어젯밤도 그랬다. 눈이 조금 내리는 것 같더니만 금세 쌓여있었다. 그 사이 옆집 아저씨는 이사를 갔다. 세단이 들어가기에는 애매하게 조그마한 주차장은 옆집 아저씨가 이사 간 뒤로 공실이었다. 텅 빈 주차장에 눈이 소복 쌓인걸 보니 눈사람을 만들던 그날 생각이 났다. 우리는 눈이 조금 더 쌓이면 또 한 번 눈사람을 만들자 하면서 소심하게 신발을 끌어 현관 앞에 큐피드 하트를 그려놓았다. 그러면서 내일 아침, 누군가 출근을 하려고 나오면서 이 하트를 보겠지? 기분 좋았으면 좋겠다. 낄낄 하면서 들어왔다.  


 요즘 심취한 유튜브 채널 중 닥터프렌즈라는 3명의 의사가 운영하는 채널이 있다. 거기 출연하는 오진승 정신의학과 의사 선생님이 한 말 중에 마음에 남는 말이 있었다. 부정적 경험으로 각인된 트라우마는 긍정적 자극으로 중화시킬 수 있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우울감이 들거나 과거의 좋지 않은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긍정적인 자극을 많이 만들려고 노력하는 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자극을 만들려면 좋은 경험을 위해 기꺼이 움직여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눈사람 만들기는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눈이 쌓일 때마다 멜랑꼴리 해지지 않고 깔깔 눈사람을 만들던 그날을 떠올리니 말이다. 이 밖에도 긍정적 자극을 만들기 위해 움직일 수 있는 순간들이 사실은 많을 것이다. 다만 눈이 쌓인 날처럼 말이다. 살면서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꺼이 움직이기로 했다. 적절히 버무려져 너무 슬프지도 너무 기쁘지도 않은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만 싶다.


 날씨가 많이 추우니, 아마도 요 며칠은 눈구경을 실컷 할 수 있겠지? 내년이 되면 유나가 이사를 간다. 가까운 곳에 살게 되겠지만, 유나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 눈사람을 한번 더 만들고 싶다. 코가 벌게진 채로 사진을 찍어두어야지. 그리고 이사한 유나 집 냉장고에 두 개의 눈사람 기념샷을 나란히 붙여주고 싶다. 고무장갑을 점검해 보아야겠다.

그 날의 눈사람
어젯밤 현관 앞에 그려놓은 큐비드


주차장에 쌓여가는 자원


작가의 이전글 일기는 아침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