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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잔디 Jan 31. 2024

그 죽음에 얼마나 나는 무심했는지

 며칠 전 눈이 많이 내린 날, 아 추워 아 추워하며 종종걸음으로 걷던 날 밤. 잠이 오지 않아 가는 눈으로 하염없이 스크롤을 내리다가 설원 사진을 보았다. 새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동산에 나무 한그루가 하얀 모자를 뒤집어쓴 채 외따로 서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어 바깥을 보았다. 높이가 같은 회죽색 빌라가 조밀하게 끼여있었다. 창문은 모두 닫혀있었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쌓여있지 않았다. 눈이 조금 쌓였다면 삭막해 보이는 동네가 조금 귀여워질 수도 있었으련만. 눈은 땅에 닿자마자 사라졌다. 검게 젖은 땅이 눈이 오는 족족 핥아먹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입김을 호 불어보았다. 연기는 얼마 가지 못하고 흩어져 사라졌다. 숨을 더 깊이 참고 나서 다시 후 입김을 불었다. 이번엔 내리는 눈을 조금 뚫고 나가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갔다. 꽤 멀어질 때까지 김이 사라지지 않았다.


 ‘입김을 더 길게 불어봐 줘.’ 눈 내리던 겨울, 강원도 어느 해변에 서서 나는 그가 하라는 대로 입김을 가늘고 길게 불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서서히 호흡을 나눠내며 입김이 나가는 시간을 늘렸다. 평소 입김을 후 불어볼 때 짓는 즐겁거나 후련한 느낌이 아닌 잔뜩 집중한 표정이 되었다. 그걸 보고 그는 입김을 그리 심각하게 부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와하하 웃었다. 나는 억울한 시늉을 하다 함께 와하하 웃었다. 팍 웃는 입김이 아마도 가장 길고 또렷하게 나왔다. 결국 마음에 드는 사진은 건지지 못했다. 그는 아마추어 사진가였고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풍경을 특히 좋아했다. 허벅지까지 쌓여있는 눈을 석석 가르며 걸어가 자연이 깨끗이 지운 모습을 담았다. 그는 말수가 유독 적어서 꼭 필요한 말만 하곤 했는데 그런 그가 믿음직하게 느껴졌다. 줄곧 그의 카메라 앞에 서서 예쁜 척을 하기도 슬픈 척을 하기도 무언가를 멍히 응시하기도 눈을 감기도 했다. 그는 좋다는 말도, 예쁘다는 말도 없었다. 그저 다음 장소로 걸음을 옮기고 또 사진을 찍고 이따금 커피를 한 잔 마시고 헤어지곤 했다. 날씨가 좋은 5-9월에는 양재 시민의 숲이나 선유도를 자주 갔다. 나는 그와 함께 지나가는 사람들과 들꽃과 개를 찍었다. 그는 내 눈동자가 자세히 볼수록 짙은 나무의 갈색을 띠는 게 매력이라고 했다. 푸른 계절이 지나 겨울이 오면 우리는 거의 만나지 않았다. 나는 추위를 잘 타서 겨울엔 몸을 말아 지냈다. 그는 눈이 펑펑 올 때면 어김없이 강원도로 갔다. 눈이 오는 날 그와 함께 강원도에 간 것은 겨우 한 번뿐이다.


 갑작스럽게 그가 말기 위암 판정을 받았을 때, 서울엔 머물 병실이 없었다. 그는 집과 회사가 모두 경기도 오산에 있었기 때문에 통원치료를 위해 서울로 집을 옮기기도 어려웠다. 고민할 새도 없이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지만, 아무튼 서울에서 지내기는 무리였다. 그는 동해로 갔다. 동해에 있는 암병동은 서울에 비해 느낌상 차분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면회실 창문으로 태백산맥이 보이기도 하고, 환자도 보호자도 곡소리를 내는 경우가 없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동해로 갔다. 나 외에도 많은 친구들이 그를 찾아와 멋진 사진집과 카메라를 선물했다. 그는 내게 그것들을 나눠주기도 했다. 수년 전 나는 그와 함께 사진집을 내보자는 꿈을 꾸렸다. 내 미니홈피에 그가 사진을 업로드하고 내가 거기에 글을 쓰는 식으로 작업을 이어갔다. 이게 100개가 모이면, 아니 최소 200개 정도 모이면 함께 독립출판 클래스를 듣자. 하고 다짐했다. 그래서 그는 병문안을 갈 때마다 내게 좋은 사진들, 좋은 전시를 소개해주며 원고에 관한 영감을 얻기를 바랐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서로 어떤 것을 상실할지 실감하지 못했다.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고, 누구나 아플 수 있으며, 대게는 극복하기 마련 이라고만. 그렇게만 믿었다.


 그는 내게 몇십 통의 필름을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빈소에 가지 못했다. 그곳에 놓인 그의 얼굴을 보는 게 너무나 이상해서, 몇 번 찾아가지도 못했는데 떠나버린 그가 원망스러워서, 아니 그가 죽었다는 게 무서워서. 그런 이유로 무심했다. 한창 새로운 음반을 제작하는 중에 그가 찍어준 사진들을 펼쳐보았다. 오누이 앞인 듯 자연스러운 표정. 사진 속 내 표정이 어색하게 느껴질 만큼, 카메라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지어보인지 참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만 담을 수 있었던, 한 철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곡으로 남기려 결심했을 때, 설원의 풍경과 나의 무심함을 빼놓고는 마치 거짓말이 될 것이다.


이제 와서 그를 위한 노래를 쓴다.

음악은 죽지도 불태워지지도 않는 기억이 될 것이다.

그것으로 나의 무심함이 조금은 용서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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