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고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부터 나의 삶은 많이 변했다. 엄마는 일을 하러 멀리 간다고 말했고 우리는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학원을 갈 돈이 없어서 방 한 칸에서 아버지가 가져다주는 교사용 교재를 가지고 공부를 했고 할머니가 시장에서 사다 주는 5천 원짜리 이름 모를 브랜드가 적힌 옷들을 입으며 응석이라곤 모르는 아이로 자라기 시작했다.
2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고 나는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해주기 위해 내 나이 또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워져야만 했다.
"동생 잘 부탁해 아들, 엄마가 많이 사랑해"
라는 눈물 섞인 인사로 언제나 전화를 끊었고 매일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없이 울면서 나의 감정을 지우고 아픔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할 수 있는 건 공부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냥 공부만 했다. PC방에 가자는 친구들의 말에 주머니 속에 있는 천 원짜리를 만지며 공부를 해야 한다며 거짓말을 했다. 그 덕에 나는 범생이 같은 놈이라는 기분 좋은 오해를 사며 집으로 혼자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에 가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의 이런 믿음은 점점 더 심해졌다. 누구보다 말 잘 듣고 밝고 행복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하면서 살았지만 내 가슴속에는 억눌려 표현되지 못한 수많은 감정들이 모여 어둠이 되어 자라고 있었다. 운명이 장난을 친건지 하필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잘 가지 않는 명문고등학교로 배정이 되는 바람에 고등학생 때 이미 고등학교 공부를 다 끝내고 온 부잣집 아이들과 경쟁을 하게 되었다. 17살 때 나는 처음으로 '노력하면 다 된다'는 이 말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걸 실감했다. 그래, 물론 노력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경쟁사회에서 내가 노력할 때 경쟁자인 그들도 똑같이 노력한다는 게 문제였다. 토끼와 거북이 같은 이야기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게으른 토끼가 아닌 열심히 달리는 토끼도 존재한다는 걸 봐버렸으니까.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기 전에 학교를 자퇴했다. 홀로 검정고시를 보며 학교에 다니는 시간도 아껴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하루를 설계했다. 좋은 대학에 가서 우리 가족에게 행복이라는 걸 선물해주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 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렇게 나의 학창 시절은 사라졌고 어두컴컴한 독서실의 적막 속에서 2년을 보냈다.
혼자서 잘할 수 있다고 그렇게 아버지를 설득하고 스스로도 오랜 시간 고민하고 다짐했지만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나약했다. 소속된 집단이 사라지고 고등학생이라는 껍데기가 사라지자 나를 보호해주고 설명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생각이 나를 점점 좀먹었고 결국 성적은 수직으로 떨어졌다.
첫 수능 성적은 처참했고, 그렇게 재수, 삼수를 하고 난 뒤에도 계속 실패했다. 스스로를 패배자로 낙인 찍은 뒤에 어쩔 수 없이 군대로 도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는데 상담 선생님께서 나에게 우울증이라고 말했다.
학생 우울증이에요.
네? 전 우울하지 않은데요..
그게 제일 위험한 거예요.
처음이었다. 내가 우울하구나. 가까스로 현역을 받았지만 심리상담을 권고받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미안해. 아들 엄마 때문이야"라며 어머니는 자신을 탓했다. 이게 너무 싫어서 상담을 받으러 갔다. 사실 쪽팔렸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우는 걸 보는 것보다 나으니까
상담 선생님은 흰 종이와 펜을 내 앞에 두고 20분 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보라고 말씀하신 후 나가셨다.
'짹깍짹각' 시침 소리만 가득한 공간, 숨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말을 적어보라는데 나는 종이에 조차 나의 이야기를 단 한 문장도 적을 수가 없었다. 아니, 돌아보니 살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늘 참아왔으니까.
아주 어렵게 어렵게 첫 문장을 적었다.
"나는.. 불행하다.."
첫 문장을 적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왜 나오는지 모르는 이 눈물은 그동안의 나의 서러움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둑을 무너트렸다. 첫 문장을 시작으로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적어 내려갔다. 사실 나도 응석 부리고 싶었고, 너무 힘들었고, 외로웠고, 무서웠고, 편하게 살고 싶었다고.. 부모님을 처음으로 탓해보기도 하고 이 세상을 원망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새하얀 종이 한 페이지가 나의 설움과 눈물로 가득 채워졌다.
20분의 시간이 끝나자 이상하게도 정말 후련했다. 아이처럼 엉엉울었지만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불행하다고 말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괜찮구나..
그 뒤로 매일매일 수많은 글을 썼다. 나의 불안과 나약함, 두려움과 원망 같은 것들을 쏟아냈다.
글을 쓰면서 나는 서서히 회복했다. 그동안 기피했던 나의 진짜 모습들과 감정들을 마주하니 마음에 근육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 덕에 우울증과 대인기피증도 사라졌고 조금씩 다시 세상을 향해 도전하고 싶어 졌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다. 운동을 시작하고 대학을 다시 갔고 군대도 무사히 다녀오며 나 스스로를 사랑해주기 시작했고 또 이런 나를 사랑해주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썼던 글들은 올해 <시작할 용기가 없는 당신에게>라는 책이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당신의 시작은 생각만큼 화려하지도 멋있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보다 훨씬 초라하고 비참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 시작이 어떤 모습이든 또 언제 든 간에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시작한다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 당신에게 새로운 시작과 수많은 시작을 할 수 있는 용기가 되어줄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의 첫 문장은 "나는 불행하다" 였지만 이제는 안다. 사실 이 문장은 "나는 행복하다"라고 적기 위한 첫 문장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