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의 밤은 아름다웠다
기자로서 처음으로 대통령 해외 순방을 함께 했다.
사상초유 1박4일의 여정이었다. 현지 워싱턴 시간으로 월요일 오후 6시경 도착했고, 정확히 24시간이 지난 다음날 오후 6시에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번 순방일정이 어쩌다 1박4일로 구성됐냐는 질문에 청와대 관계자는 "순방 일정이 하루에 다 소화가 가능한데 굳이 하루 더 있을 필요가 없잖아요?"라고 되물었다.
(순간 한 전직 대통령이 해외순방때 새 침대 매트리스를 요구하고 메이크업 부스를 설치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기자들도 기자들이지만, 대통령 부부를 비롯한 수행원들, 그리고 누구보다 이 많은 인력을 챙겨준 기내 승무원분들의 노고가 컸다.
1박4일의 일정이 말해주듯, 워싱턴 땅위에 있던 시간보다 비행기 안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다. 현지시각 화요일 저녁 6시경에 비행기를 몸을 실었는데, 서울에 도착한 시간은 목요일 오전 1시였다.
그래도 첫 해외순방 출장인지라, 호텔에만 있기엔 너무 아쉬웠다.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워싱턴에 살고 있는 지인에게 연락했다.
"오늘 저녁 가능해?" "응 가능해. 어딘데?" "나 워싱턴이야! 순방 왔어! 저녁 먹자!"
나의 번개 저녁 제안에 응해준 워싱턴 지인은 우리 회사에서 일했던 미국인 에디터 '줄리 (Julie)'다. 현재 워싱턴포스트 (Washington Post) 디지털 콘텐츠 제작자로서 일하고 있다.
러시아 출신으로 7세 경 미국으로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이민했다. 러시아어는 물론 유창하다.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그녀는 누구보다도 언론에 대한 열정이 큰 친구다. 그 열정만큼이나 속도 깊은 친구다.
넥타이까지 한 정장차림으로 워싱턴포스트를 향해 걸었다. 마침 시간도 딱 저녁시간. 정장을 입고 워싱턴 도심을 걸으니 마치 내가 이곳에서 오래 살고 있는, 정치인의 보좌관인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미드 웨스트윙이나 하우스오브카드 주인공, 혹은 주인공의 보좌관이 된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줄리를 만났다. 2년 만의 만남이었다. 줄리는 여전히 밝았고 속이 깊었다. 언론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미국 최대/최고 언론사에서 일하는 것에서 오는 부담감에 대해 토로했지만, 최고의 저널리즘 컨텐츠를 만들고 싶어하는 그녀의 열정은 예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넌 오늘 손님이니까 계산할 생각은 하지도 말고. 여기 기자들이 많이 가는 곳을 데려가 줄게"하며 나를 이끌었다. 역시 속이 참 깊은 친구다..... ㅎㅎ
멋들어진 식당으로 줄리는 나를 이끌었다. 테라스에 자리를 앉아 오고 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하늘은 무척 파랗고 맑았다. 미세먼지 걱정 없이 사는 것이 어떤 삶일지 생각해봤다. 워싱턴의 사람들이, 아니 이 대륙의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미국 기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줄리는 "트럼프를 정말 잘 다루는 것같아. 트럼프를 칭찬하는 거 말이야. 특히 노벨상은 트럼프가 타야 한다는 발언이 압권이었어"라고 했다.
그녀에게 해당 발언 행간의 의미에 대해 말해줬다. "노벨상은 트럼프가 타야 한다"란 의미 속에 "한반도에 평화만 정착시킬 수 있다면, 노벨상은 필요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타도 된다"란 메시지가 있었다고. 트럼프를 단순히 기분 좋게 해주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고.
줄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이후 미국의 정부 기관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고 걱정했다. 미국 정치의 핵심은 법에 근간한 통치 (Rule of Law)인데 비즈니스맨 출신인 트럼프는 그 원칙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난 그녀에게 걱정을 이해하지만, 너무 크게 하진 않아도 좋을것 같다고 했다. 2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지켜오고 발전해온 공공기관들의 정치적 독립성이 한 사람으로인해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비록 지금은 그 위협아래 있어 보이지만, 공공기관의 정치적 독립성은 금방 회복될 것이라고. 오랜시간 보존해온 그 원칙이 쉽게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훼손을 시도하는 사람이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하루밖에 있을 수 없음을 아쉬워하며 저녁을 먹었고, 줄리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리고 호텔에 돌아가 기사를 썼다.
기사를 송고하니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은 후 백악관까지 달렸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백악관 앞엔 관광객들이 몇몇 보였다. 그들을 지나치며 계속 뛰었다. 백악관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과 인사도 하며., 마치 그곳에서 몇 년은 산 사람처럼.
꽤나 만족스러운 첫 해외 순방의 첫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