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개에게 두 번 물린 기억이 있다.
5살 즈음, 집에서 키우던 검정개에게 먹이를 줄 듯 말 듯 장난을 치다가 손을 물려 버렸다. 아팠던 기억도 무서웠던 기억도 없지만, 엄마의 이야기와 사진 속 나보다 커다란 개에게 손을 뻗치고 있는 모습으로 가물가물한 기억이 점차 또렷하게 저장되었다. 정확한 기억이라기보다 스토리의 재창조라 해야 할까.
두 번째로 물린 것은 너무도 또렷이 기억이 나는데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마주한 개떼, 지금 생각해 보면 하얀 스피츠 무리였던 것 같다. 옛날에는 목줄도 하지 않고, 마당에 풀어놓고 키우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1~2학년 쯤되었을까? 나는 겁에 질려 무조건 달렸고, 개떼는 무섭게 짖고 내 발뒤꿈치를 물며 달려왔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 간신히 집으로 도망친 나는 온 힘을 다해 대문을 걸어 잠갔다.
이런 기억들을 가지고 성인이 된 후에도 개가 이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개를 키우는 친구 집에 놀러 가도 다가오는 것이 불편하기만 했다.
한마디로 개라는 것, 나아가 동물이라는 것은 그저이지구상에 더불어 공존하게 된 숙명이었다. 거리를 지나다 마주치는 개들을 본능적으로 피해 다녔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불편한 동거이므로.
10여 년 전 어느 봄날,
갱년기가 다가오면서 내 몸과 마음은 겹겹이 쌓인 작은 통증들이 합심하여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제 밖으로 나아가야겠다고. 꾹꾹 눌러 두었던 압력이 힘을 소진하자, 묵혀 두었던 통증들은 저마다의 소리를 내며 소란을 떨었다. 마침내 로켓이 우주로 날아오르듯 요란한 굉음과 함께 통증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리고 뜨거운 불길과 함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날지 못하고 폭발하였다. 그 잔해는 고스란히 내 곁으로 나풀거리며 내려앉았고, 이제 그토록 억눌렀던 나의 통증들과 오롯이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우울증과 공황장애의 시작이었다.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다. 공황은 어느 정도 약으로 다스릴 수 있었지만, 우울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다시 맑게 웃을 날이 있을까.
다시 가슴 뛰게 설레는 날이 있을까.
그렇게 시간은 자꾸만 나이를 먹고 있었다.
안타깝게 지켜보던 친구들은 개를 키워 보라 권했다.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많이 된다며. 특히 어릴 적부터 개와 동고동락을 한 친구, 개전문가는 여려 견종을 소개하며 각각의 특색을 설명해 주고, 나에게 어울릴 만한 개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개?
개가 똥을 싸면 어떻게 치워?
목욕은 어떻게 매일 시키지?
개털은?
냄새는?
집이 더러워지면?
인테리어를 망치잖아!
푸들? 말티프? 시추? 포메라니안? 비숑? 닥스훈트? 슈나우저?.........
아무리 둘러봐도 마음에 드는 개는 없었다.
좁히고 좁혀 푸들이나 비숑이 그나마 낫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마저도 그렇게 끌리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인 개전문가는 말했다.
"개를 키운 다는 것은 아기 하나를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야! 그런데 이것저것 따지고 경험도 없고 더군다나 개똥을 어떻게 치우냐니... 그러면 개 키우지 마. 오히려 서로 스트레스받고 게다가 그 개는 또 얼마나 불쌍하니?"
한마디로 나는 개를 키울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개에 대한 미련은 말끔히 사라졌고, 시간은 또 나이를 먹고 있었다.
나에게 한 장의 사진이 도착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