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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욱 May 28. 2019

계란 두 판과 흰 지팡이


"저기 아저씨 거예요"

마음씨 좋아 보이는 여자분께서 계산대에 계란 두 판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 여자분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조금 특별한 손님이 계셨다. 그분은 흰 지팡이로 땅을 가볍게 탁탁 치며 천천히 계산대를 향해 오고 계셨다. 흰 지팡이를 보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리 가게를 방문해주신 첫 시각 장애인 고객이셨다.


일반적인 마트들이 그러하듯이 우리 마트도 꽤나 시끌벅적하다. 빠른 템포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음악소리뿐만 아니라 '오늘까지만 전단 세일가로 드립니다. 앞다리살이 한 근에 4,200원!'같은 매장을 가득 메우는 멘트 소리, 그리고 '엄마 나 저거도 사줘', '오늘은 하나만 고르라고 했지!'같은 고객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까지 온갖 종류의 소리가 모여있는 곳이다. 흰 지팡이를 쥔 손님은 바로 그 수많은 소리를 뚫어내고 계산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장님, 이쪽입니다" 소리의 홍수를 뚫고 그분에게 닿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목소리를 조금만 높였을 뿐인데도 그분은 따뜻한 목소리로 맞아주셨다.


"4,360원입니다" 익숙하게 계산된 금액을 말씀드렸다. 그분의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이 나왔다. 지폐가 보이지 않을 텐데 시각 장애인은 현금 결제를 어떻게 하지?


"여기 있습니다" 내 우려와는 달리 그분은 익숙하게 천 원짜리 다섯 장을 건네주셨다. 비장애인보다 아주 조금 시간이 더 걸렸을 뿐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지폐에 점자표시가 돼있어 시각 장애인은 그걸로 지폐를 구별한다는 걸 어디서 들은 것 같다.


"들고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거스름돈을 내드리며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두 손이 자유로운 비장애인이라면 양손에 한 판씩 들고 가면 그만이겠지만, 그분 한 손에는 흰 지팡이가 들려있었다. 그분은 괜찮다고 말하시며 다른 한 팔로 계란 두 판을 한 번에 안으려고 하셨다. 아무래도 한 팔로 안고 간다는 건 너무 위험해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계란은 떨어뜨리는 순간 다 깨져버리는 거니까.


"끈으로 묶어드릴까요?"

"그렇게 해주시면 좋죠"

그동안 할머니들이 오시면 끈으로 묶어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았다. 이제 계란 두 판 묶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여기를 잡으시면 됩니다" 매듭 부분이 그분의 손에 닿을 수 있게 드리면서 말씀드렸다.

"아이고, 너무 고맙습니다" 목소리를 조금 높였던 아까와도 같이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작은 배려에도 크게 감사해주시는 고마운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께서 나가시려고 발을 돌리는 순간,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계산을 마쳤으니 출입구를 향해 나가야 하는데 출입구와 정반대인 매장 안쪽을 향해 걸어가시는 것이었다. 순서를 기다리는 뒷 손님께 양해를 구하고 잠시 계산대를 나왔다.


"사장님, 이쪽이 출입구 방향입니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라고 말하고는 매장 입구까지 배웅해드렸다.

"고맙습니다" 따뜻했던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분은 다시 또 흰 지팡이로 땅을 가볍게 탁탁 치며 가셨다.


시각장애인으로서 마트를 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제야 알게 됐다. 알고 보니 그분이 계란을 찾아오실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었다. 비장애인들은 탄산, 이온음료, 커피 중에서도 선호하는 특정 브랜드를 콕 집어서 마시지만 시각 장애인들은 원하는 음료조차 제대로 고르기 어렵다. 시중에 판매되는 캔음료 대부분은 탄산, 이온, 커피 가릴 것 없이 모두 점자로 '음료'로만 써져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더 깊게 보면 음료는 그나마도 나은 편이다. 캔음료 이외의 다른 제품들은 각 과자인지 커피믹스인지 보리차인지 구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점자조차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온갖 소리의 홍수 속에서 원하는 물건을 제대로 찾기도 힘들다. 비장애인인 누군가에게 마트에서 장보는 일은 그냥 하루하루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는 시시한 일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한 번이라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이해의 폭은 넓어진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그동안 흰 지팡이의 존재를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이제야 그분을 잠시 상상해보며 시각 장애인으로서 마트를 다닌 다는 것의 험난함을 알게 됐다.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기에 갑자기 대기업 사장들에게 음료수에 점자 좀 제대로 박으라고 할 수도 없고 과자나 커피에도 점자를 박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그분이 돌아가시는 길에 계란을 묶은 끈이 풀어지지 않았기만을 기도하는 것, 혹여라도 그분이 다시 오시거든 계란이 깨지지 않도록 끈을 단단하게 더 잘 묶어드리는 것뿐이었다.


누군가의 소일거리는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건 모험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아직도 한없이 부족하고 작은 사람이기에 그 모험을 소일거리로 만들정도로 세상을 뒤엎을 힘은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한 아주 미약한 힘이라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힘을 나누며 살고 싶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소일거리일 수도 있는 또 다른 모험을 하는 한 사람이었고 많은 도움을 받아왔으니까. 어떤 종류의 모험을 하는 누군가에게라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그분이 집까지 가는 동안 계란이 깨지지 않았기만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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