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경욱 Nov 08. 2018

진상의 평범성

경계하지 않는 한 우리는 모두 진상이 될 수 있다


이 글은 모바일 다음 메인에 노출 됐던 글입니다
사람 속은 수박과도 같다

여름에 수박을 팔다 보면 아주 낮은 확률일지라도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곪아있는 수박이 한 통쯤은 나온다. 진상고객도 수박과 같다. 하루에도 고객 수 백 명을 상대하다 보면, 아주 낮은 확률일지라도 겉은 멀쩡한데 속이 곪아있는 진상이 나온다.


흔히들 진상이라고 하면 다루기 힘든 손님을 모두 진상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씨가 많아 먹기 힘든 수박과 속이 곪아 먹을 수 없는 수박이 다르듯이 강성 고객과 진상고객 또한 다르다. 강성 고객은 표현방법이 조금 강경하거나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도 결국엔 대화가 통하는 사람인 반면, 진상고객은 규정이나 논리를 무시하고 '너 내가 누군지 알아?'식으로 협박하며 목소리를 높이거나, 심지어는 폭언을 하며 무조건 일방적으로 우기는 사람들이다.


내가 겪은 최악의 진상은 어떤 아주머니였다. 어느 날은 무 한 박스와 애호박 네 개를 주문하셔서 배달을 해드렸다. 그런데 잠시 후 다시 전화를 해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애호박이 두 개만 왔다며 욕을 하신다. CCTV고 차량이고 모두 확인해본 결과 이상은 없었지만 그래도 없다고 하시니 그냥 새로 애호박을 두 개 더 갖다 드리기로 했다. 점입가경으로 배달직원이 새로 가져간 애호박을 화를 내며 그를 향해 던졌다고 했다. 그리고 한참 뒤엔 다시 또 매장에 전화가 걸려왔다. 왜 무 박스 안에 애호박을 넣어놔서 이 고생을 시키냐며 또 욕을 한 바가지 퍼붓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분명 아까 본인이 박스 속까지 다 확인해봤는데 안 왔다고 했다. 어쨌든 없다고 하시니 우리가 애호박을 새로 갖다 드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애초에 본인이 박스를 제대로 찾아지도 않은 거였으면서 전화해서 또 욕을?


진상은 화내고 싶은 것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화내고 싶은 때에 화를 낸다

사실 알고 보면 진상들은 특별히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 식당 아주머니도 평소에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날만큼은 누구보다 악랄한 진상으로 돌변했다. 이처럼 평범하던 사람도 화를 내고 싶은 순간이 오면 진상으로 돌변한다. 어쩌면 그 날은 누군가에게 왕창 깨진 날일 수도 있을 테고, 어쩌면 그 날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큰 지출이 발생한 날일 수도 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있었는지 몰라도 영 운수가 좋지 못한 날엔 '누구 한 놈만 걸려봐라'라는 준비태세를 갖추고 화풀이할 상대를 찾는다. 이렇다 보니 진상고객들은 특별히 '화나는 것'이 있어서 화가 났다기보다 본인이 '화내고 싶은 때'이기에 화를 내며 진상이 된다.


물론 어떠한 경우에도 내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상해를 입히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들도 이런 당연한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평범한 고객이 갑자기 어느 날 진상고객으로 돌변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화를 내고 싶은 때라고 해도 본인의 직장 상사에게도 그렇게 화를 낼까? 아무리 화를 내고 싶은 때라고 해도 마동석 같은 덩치의 형님에게도 그렇게 화를 낼까? 아무리 화를 내고 싶은 때라고 해도 경찰관이나 판사에게도 그렇게 화를 낼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진상들이 화내고 싶을 때 마음껏 화를 내는 이유는 아마도 본인이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다고, 갑의 위치에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에 취해 왕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고 심지어 내 맘에 들지 않으면 욕도 언제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렸기 때문은 아닐까?



손님은 왕이다 속에 내재된 진상성

'손님은 왕이다'가 평범한 세상에 사는 한 우리 속에는 진상이 내재되어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도 진상이었다. 거의 10년 전 한 테마파크에서 어떤 아르바이트생이 우리 일행을 의도적으로 불친절하게 대하고 최대한 대기줄의 끝에 서게 만들었다. 화가 나 고객센터에 항의를 했고 결국 일하고 있던 아르바이트생과 그 구역 담당 직원까지 고객센터까지 직접 와서 사과하게 만들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거나 욕을 하지는 않았어도 분명 나도 진상이었다. 잘못된 서비스에 대해 지적하고 고쳐주기를 요청하면 그만이었지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당연한 소비자의 권리를 행사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죄송스럽고 낯 뜨거운 일이다.  어쩌면 나도 '손님은 왕이다'라는 문장에 취해 필요 이상의 것을 아르바이트생에게 요구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뉴는 지속적으로 갑질 관련 뉴스로 도배가 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물컵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사무실 한가운데서 직원을 폭행한 사람도 있었다.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만 갑질 하는 것도 아닌 것이 '홍제동 경비원 폭행사건'이나 맥도날드 드라이브 스루에서 음식을 집어던진 '갑질 손놈' 같이 일반인도 본인이 상대보다 우위에 선다는 생각이 들면 가차 없이 약자를 향한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잔인하게 자행한다. 이 모든 사건의 근본 원인은 '손님은 왕이다'처럼 '내가 너보다 위다'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오직 천성이 악마 같은 사람만이 진상이 되고 악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은연중에 생기는 권력관계를 악용하고 상대를 깔아뭉개는 순간 우리 속에 감춰져 있던 진상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우리를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는 감정노동과 일상 속의 갑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감정노동자도 누군가의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생각도 조금씩 퍼지고 있고 최근에는 감정노동자 보호법도 제정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감정노동자 보호법은 사용자를 제재하는데만 중점을 두고 있다. 그뿐 아니라 아직도 감정노동자가 소비자와 동등한 인격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보다 '손님이 왕이다'라는 권력관계에 취해있는 소비자들의 수가 아직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세상에 돈이면 다되는 일은 없다. 아무리 서비스를 제공받고 그 대가로 돈을 지불한다고 하더라도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정노동자에게 그의 인격까지 서비스할 것을 강요할 수 없다. 아직 우리 문화 속에 '손님이 왕이다'라는 생각이 만연할수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도 언제든 갑질의 주범이 되고 진상이 될 수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늘따라 영화 속의 그 대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 사람 되는 건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맙시다

- 생활의 발견 중


Executive Summary : 
오빠랑 지게차 타러 갈래? (안정적 기름집 김 씨는 왜 불안정적인 마트삼촌 김씨가 되었을까) 


1부 - 대퇴사시대

0화 : 대퇴사시대, 도대체 왜 퇴사하세요?

1화 : Professionalism, 멋있잖아요

2화 : 노인의 얼굴에 나이테 대신 동심이 내린 이유

3화 : 내가 만난 '난놈'들의 공통점

4화 : 진짜 히치하이커는 엄지를 들지 않는다

5화 : 틀린 인생은 없어 다르게 살아도 괜찮아

6화 : 꿈을 강요하는 사회

7화 : 일출 보러 가다가 퇴사결심

8화 : 새장 속의 새는 새가 아니다(Brunch Editor's pick)

9화 :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10화 : 사직서를 준비하는 네가 알면 좋을 세 가지


2부 - 소상공인 라이프 소상히 알려드립니다.

11화 : 가라앉을 것인가 헤엄칠 것인가

12화 : 고객관리의 핵심은 메아리다

13화 : 그대, 존경받아 마땅한

14화 : 네비 있으세요?

15화 : 이 길로 가는 게 제대로 가는 걸까

16화 : 행복하자. 아프지말고.

17화 : 영민할 것인가 따뜻할 것인가

18화 : 우리 동네에서 가장 소중한 가게

19화 : 모범생 남 대리가 사업을 말아먹은 이유는

20화 : 칼퇴할 수 있고 주말근무 없으면 워라밸일까?(Brunch Editor's pick)

21화 : 왜 장사하는가?

22화 : 이 가게, 한 달에 얼마 벌까?

23화 : 사장님, 이렇게 팔아서 남아요? - 박리다매 경제학

24화 : 진상의 평범성(Brunch Editor's Pick)

25화 :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이 잘 나가는 이유

26화 : 유해진에게 배우는 싸가지경영

27화 : 무른 귤과 아버지

28화 : 백종원이 말하는 장사 마인드

29화 :  이 식당은 50분만 일하면 한끼가 무료입니다

감사인사 : 꿈 하나를 이루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이성당 사장님을 만났어요)

30화 : 성심당은 파리바게뜨가 부러울까?

31화 : 그 자켓을 사지 말라던 파타고니아의 오랜 진심

감사인사 : 또 하나의 꿈이 이뤄졌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감사합니다

32화 : 어쩌다 대기업 그만두고 마트를 하게 됐어요?(Brunch Editor's Pick)

33화 : 울었다. 밥을 먹다 울었다.

34화 : 쿠팡의 시대, 동네마트 생존전략

35화 : 그렇게 마트가 된다

36화 : 가족같이 일하기 vs 가족이랑 일하기

37화 : 우리 동네 가장 소중한 가게가 되는 장사법

38화 : 현직 마트 삼촌입니다. 질문 답변드립니다

39화 : 군산에서 장사한다는 것

40화 : 사업... 나도 할 수 있을까

이전 15화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회사원 김씨 마트삼촌 김씨가 되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