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들어간 대기업을 퇴사하는 이유
대퇴사시대
바야흐로 대퇴사시대다. 그 언제보다도 퇴사 콘텐츠가 범람하고 '나는 이렇게 퇴사했다', '나는 퇴사 후 이렇게 산다'류의 글들이 많아졌고 검색창에 '퇴사하는 법'을 검색하기도 한다.
회사에서 나만의 꿈을 멋지게 펼쳐 보이겠다고 자소서를 고쳐 쓰던 그 나날들, 면접을 기다리며 스터디까지 조직해가며 회사를 공부하고 정성껏 준비하던 그 시간들, 최종 합격 결과를 듣고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뛰었던 그 심장 박동까지. 분명 회사를 입사하는 과정은 절대 쉬운 길은 아니었다. 취직 혹은 이직이 쉬워져서 퇴사가 점점 더 관심받는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우리 세대가 회사를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긋지긋하고 고질적인 '대기업병' 때문이다.
대기업병 : 기업의 규모가 비대해지면서 나타나는 구성원의 무사안일주의, 관료화, 관행, 인사적체, 의사결정 지연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대표적인 세 가지 키워드로 대기업 병을 진단해본다.(사실 진단할 것도 없이 이미 우리가 매일 겪는 일들이다)
면피문화
항상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책을 찾기보다 책임을 돌릴 누군가부터 찾는다. 그 이유는 매번 새롭다. 누군가는 이번에 승진해야 하니까 책잡히지 않으려고, 누군가는 단순히 혼나기 싫거나 무능하게 보이기 싫어서. 내가 잘못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폭탄 돌리기가 일상이고 문제가 발생되면 어떻게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할까 고민한다. 그 누구도 이건 제 잘못입니다 인정하고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회의를 위한 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였는데 회의만 시작하면 똑똑하게 안 되는 이유만 찾는다. 언제나 그렇듯 안될 이유를 찾는 것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보다 훨씬 쉽고 '이것 까진 생각 못하셨나 본데' 혹은 '안 해봐도 이럴 거 아는데'식의 잘난 척으로 이어진다. 혹은 앞선 면피 문화가 회의에서 활약하기도 한다. 그건 저희 팀 일이 아닌데요, 그건 제 일이 아닌데요. 최대한 나중에 책임져야 할 일을 줄이기 위해서 서로 아닌데요 네가 맞는데요만 하다가 회의가 끝나기도 한다. 그렇게 회의할 시간에 조금씩만 일 했어도 이미 일은 다 해결됐을 것 같다.
숫자가 마사지된 보고서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흐름에서 결론이 나온 보고서라기보다는 '그분'의 뜻을 따라 숫자들이 마사지되어 보고서에 실린다. 여기서 마사지된다는 것은 '그분'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적이나 지표가 의도적으로 선택되고 가공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즉,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각각의 재료들을 이쁘게 마사지하여 마치 논리적인 것처럼 백업자료를 만드는 것이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알지만 굳이 말하지 않는, 어차피 보고하고 의사 결정하려면 맨 손으로 하긴 좀 그러니까 준비하는 알맹이 없는 요식행위용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다. 가끔은 정말 예쁜 쓰레기를 만드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언젠가 회사를 떠나야만 한다
내가 CEO나 임원으로서 은퇴를 하든 아니면 정년이 가까워져 눈치가 보여 떠나든 언젠가는 반드시 떠난다는 건 확실히 정해져 있다. 언젠가 이 회사를 벗어날 때, 문제 해결이나 본질 접근과는 전혀 거리가 먼 대기업병으로 가득 찬 회사에서 20여 년을 살면 그게 너무도 익숙해지지 않을까? 과연 나는 그때도 시장가치(Market Value)를 제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나는 이런 환경에서 선비처럼 고매하게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휴지에 물 빨려 올라가듯 빠르고 나도 모르게 대기업병에 물들어있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이런 두려움이 내 생각의 첫 시작이었다. 앞으로 이어질 탈선 일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의 끝에 퇴사라는 결정에 이르게 됐는지. 그리고 또 퇴사 전 어떤 준비과정을 거쳤지에 대해서 작성될 예정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탈선 일기에 앞서 이 점은 명확히 해두고 싶다.
절대로 모두에게 퇴사만이 정답은 아니다
각각의 회사는 위에서 지적한 대기업병 외에도 참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회사에는 분명 우리가 잊고 있는 장점도 있다. 예를 들면 뭐가 어찌 됐든 내일 일어나 갈 곳이 있다는 것, 여러 장애가 존재하긴 하지만 혼자서는 실현하기 힘든 대규모 프로젝트의 일을 함께 해볼 수 있다는 것, 어딘가에선 명함을 내밀었을 때 힘을 발휘하는 회사의 이름값이 있다는 것들 말이다. 퇴사가 판타지화 되면서 퇴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뭔가 희미하고 삶에 대한 고민이 덜한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는데 우리 각자는 살아가는 방향과 질감, 그리고 색채가 모두 다 다르다. 범람하는 트렌드성 퇴사 콘텐츠 때문에 굳이 섣불리 자신을 내던지지 않았으면 한다.
이 탈선일기는 퇴사계의 등대처럼 모든 직장인을 퇴사로 이끌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단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과 함께 걷는 그 길 위에 함께 하길 원한다. 우리 사회가 대퇴사시대가 되고 퇴사 콘텐츠가 늘어나는 데에는 우리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깊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더 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고 '어떻게 잘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더 깊어져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그 고민의 끝이 모두 '퇴사'로 향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고민과 결정에 따라 우리는 각자의 색깔을 빛낼 것이다. 단지 그 과정에서 함께 고민을 나누고 함께 생각을 나누길 원한다. 취업조차 안되는데 왜들 그렇게 퇴사하려고 하는지 궁금한 대학생 홍 군이든, 회사생활에 염증이난 박 대리든, 도대체 요새 애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퇴사하나 궁금한 이 실장이든 이 글이 어떻게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혹시라도 글에 궁금한 점이 있거나 혹은 부족한 점, 아니다 싶은 점이 있다면 언제든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나 또한 여전히 '어떻게 더 잘 살까'를 함께 고민하며 길을 걷고 있는 한 사람일 뿐이니까
Executive Summary :
오빠랑 지게차 타러 갈래? (안정적 기름집 김 씨는 왜 불안정적인 마트 삼촌 김씨가 되었을까)
1부 - 대퇴사시대
0화 : 대퇴사시대, 도대체 왜 퇴사하세요?
3화 : 내가 만난 '난놈'들의 공통점
4화 : 진짜 히치하이커는 엄지를 들지 않는다
6화 : 꿈을 강요하는 사회
7화 : 일출 보러 가다가 퇴사결심
8화 : 새장 속의 새는 새가 아니다 (Brunch Editor's Pick)
9화 :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10화 : 사직서를 준비하는 네가 알면 좋을 세 가지
2부 - 소상공인 라이프 소상히 알려드립니다.
11화 : 가라앉을 것인가 헤엄칠 것인가
12화 : 고객관리의 핵심은 메아리다
13화 : 그대, 존경받아 마땅한
14화 : 네비 있으세요?
15화 : 이 길로 가는 게 제대로 가는 걸까
16화 : 행복하자. 아프지말고
17화 : 영민할 것인가 따뜻할 것인가
18화 : 우리 동네에서 가장 소중한 가게
19화 : 모범생 남 대리가 사업을 말아먹은 이유는
20화 : 칼퇴할 수 있고 주말근무 없으면 워라밸일까? (Brunch Editor's Pick)
21화 : 왜 장사하는가
22화 : 이 가게, 한 달에 얼마 벌까?
23화 : 사장님, 이렇게 팔아서 남아요?
24화 : 진상의 평범성(Brunch Editor's pick)
25화 :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이 잘 나가는 이유
26화 : 유해진에게 배우는 싸가지경영
27화 : 무른 귤과 아버지
28화 : 백종원이 말하는 장사 마인드
29화 : 이 식당은 50분만 일하면 한끼가 무료입니다
감사인사 : 꿈 하나를 이루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이성당 사장님을 만났어요)
30화 : 성심당은 파리바게뜨가 부러울까?
31화 : 그 자켓을 사지 말라던 파타고니아의 오랜 진심
감사인사 : 또 하나의 꿈이 이뤄졌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감사합니다
35화 : 그렇게 마트가 된다
36화 : 가족같이 일하기 vs 가족이랑 일하기
37화 : 우리 동네 가장 소중한 가게가 되는 장사법
38화 : 현직 마트 삼촌입니다. 질문 답변드립니다
39화 : 군산에서 장사한다는 것
40화 : 사업... 나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