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욱 Jun 16. 2018

노인의 얼굴에 나이테 대신 동심이 내린 이유

나른함이 가득 찬 강의실 안에서 그가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노교수는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대학생들은 그의 강의를 따분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기업과 국제환경'이라는 수업이었다. 노교수는 항상 수출 중심의 국가에서 해운업의 미래에 대해 강조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큰 수출대국인지, 여러분은 왜 해운물류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지 등 그의 레퍼토리는 비슷했다. 언제나 그렇듯 대부분 학생들은 별 관심이 없었고 앞 줄의 몇몇은 그의 말에 깊은 감동을 한 건지 좋은 성적을 원한 건지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하나 둘 관심을 거둬갈 때, 노교수의 입에서는 수출강국, 해운물류와 같은 기존의 레퍼토리와는 다른 말이 나왔다.


여러분은 실제로 바다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의외였다. 한 학기 내내 수업을 들었지만 이 레퍼토리는 처음이었다. 아니, 내가 잠깐 졸던 그때 했던가? 노교수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내가 학교를 졸업했던 시절에는 지금 여러분처럼 해외에 나가는 게 참 쉽지 않은 시절이었어요. 회사를 다닐 때, 우연히 나는 태평양을 가로질러 미국으로 향하는 컨테이너선에 타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지요. 나는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합니다. 여러분에게 바다는 해수욕장이겠지만, 내게 바다는 대양(大洋)입니다.

노교수의 눈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껏 한 학기 내내 봐왔지만, 이 순간만큼은 완전 다른 사람 같았다.


그의 얼굴에 나이테 같은 주름 대신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피어났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봤던 그 어떤 것도 바다의 아름다움보다 더한 것은 없어요. 컨테이너선을 탈 때 나는 새벽에 가장 먼저 일어나 배의 가장 앞에서 바다 보는걸 참 좋아했어요. 배의 가장 앞에서 바다를 맞는 부분을 구상선수(Bulbous Bow)라고 합니다. 배가 앞으로 나아갈 때, 이 구상선수가 대양을 가르며 Bow wave를 만들어 내는데, 아주 파아~란 바다를 배가 가르며 나아갈 때 생기는 아주아주 하얀 Bow wave는 정말로 눈이 부셨습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반짝반짝거리던 그 바다를 나는 잊지 못합니다.

그는 마치 어린이집에서 만들어온 장난감을 부모에게 자랑하는 어린아이 같이 들떠있었다. 그 순간만큼, 그의 목소리, 표정, 눈빛은 더 이상 노교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그 날 노교수의 얼굴에서 동심 어린 웃음과 눈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았다.


나도 바다가 보고 싶어 졌다

  노교수의 말처럼 바다가 정말 그렇게도 아름다운지 확인하고 싶었다.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그가 단순히 감상에 젖어 과거를 미화한 것인지 정말 대양이 아름다운 것인지 믿을 수 없었다. 감사하게도 한 해운회사의 대외활동에 선발되어 그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노선이 아니고 황해를 가로지르는 노선이라 노교수가 말했던 아름다운 바다를 보지 못할까 봐 걱정됐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근해를 벗어나자 황해도 바다였다. 깊은 바다가 내는 파아란 빛은 정말로 매력적이었다.

그 덕에 다행히 나도 그가 말했던 Bulbous Bow에서 부서지는 파아~란 바다와 아주아주 하얀 Bow wave를 볼 수 있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많이 아름다웠다. 아마 젊은 청년이었던 노교수에게 해운회사 입사는 우연이었지 모르지만 그의 꿈과 평생을 해운물류에 바치게 한 것은 어쩌면 눈 부셨던 Bow wave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눈부신 Bow wave를 보고 있자니 내 눈에서도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내 눈은 지금도 빛나고 있는가?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1호선에 몸을 맡긴 채 퇴근하고 있었다. 왜 하필 그 날의 노교수의 눈빛과 웃음이 다시금 생각났을까.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 Bow wave만큼 눈빛이 빛난다. 그 순간을 소중히 생각하는 만큼 밝게 빛난다. 나는 그 날 노교수를 통해 진실로 빛나는 눈을 보았다. 내 눈은 지금 그의 것처럼 충분히 빛나고 있는가? 대학시절의 꿈 많던 나는 분명히 눈이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내 눈은 지금도 빛나고 있는가? 


내 눈은 언제 빛났던가? 새로운 도전을 할 때, 흔들리는 불안을 자초할 때, 불안했지만 내 눈은 노교수의 것처럼 빛났다. 또 지금껏 무엇을 해왔는지 말할 때보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말할 때 내 눈은 더 빛났다. 내 눈빛은 계속 과거를 추억하는 아련한 눈빛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계속 도전하는 눈빛이기를 바란다. 동태눈이 되지 않고 빛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은 답 없이 쌓여만 가고 그 무게감만이 나를 짓눌렀다. 무력감에 무거워지는 눈꺼풀만큼 무거운 몸을 1호선에 내던진 채 한숨과 고민만 한층 더 깊어져 갔다.


* 제목의 표현은 월간 에세이 15년 4월호 김신영 기자의 글(낯선 땅에 심은 사랑 한 그루) 중에서

 빌렸음을 밝힙니다.


Executive Summary :
오빠랑 지게차 타러 갈래? (안정적 기름집 김 씨는 왜 불안정적인 마트삼촌 김씨가 되었을까) 


1부 - 대퇴사시대

0화 : 대퇴사시대, 도대체 왜 퇴사하세요?

1화 : Professionalism, 멋있잖아요

2화 : 노인의 얼굴에 나이테 대신 동심이 내린 이유

3화 : 내가 만난 '난놈'들의 공통점

4화 : 진짜 히치하이커는 엄지를 들지 않는다

5화 : 틀린 인생은 없어 다르게 살아도 괜찮아

6화 : 꿈을 강요하는 사회

7화 : 일출 보러 가다가 퇴사결심

8화 : 새장 속의 새는 새가 아니다 (Brunch Editor's Pick)

9화 :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10화 : 사직서를 준비하는 네가 알면 좋을 세 가지


2부 - 소상공인 라이프 소상히 알려드립니다.

11화 : 가라앉을 것인가 헤엄칠 것인가

12화 : 고객관리의 핵심은 메아리다

13화 : 그대, 존경받아 마땅한

14화 : 네비 있으세요?

15화 : 이 길로 가는 게 제대로 가는 걸까

16화 : 행복하자. 아프지말고

17화 : 영민할 것인가 따뜻할 것인가

18화 : 우리 동네에서 가장 소중한 가게

19화 : 모범생 남 대리가 사업을 말아먹은 이유는

20화 : 칼퇴할 수 있고 주말근무 없으면 워라밸일까? (Brunch Editor's Pick)

21화 : 왜 장사하는가

22화 : 이 가게, 한 달에 얼마 벌까?

23화 : 사장님, 이렇게 팔아서 남아요?

24화 : 진상의 평범성(Brunch Editor's pick)

25화 :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이 잘 나가는 이유

26화 : 유해진에게 배우는 싸가지경영

27화 : 무른 귤과 아버지

28화 : 백종원이 말하는 장사 마인드

29화 :  이 식당은 50분만 일하면 한끼가 무료입니다

감사인사 : 꿈 하나를 이루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이성당 사장님을 만났어요)

30화 : 성심당은 파리바게뜨가 부러울까?

31화 : 그 자켓을 사지 말라던 파타고니아의 오랜 진심

감사인사 : 또 하나의 꿈이 이뤄졌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감사합니다

32화 : 어쩌다 대기업 그만두고 마트를 하게 됐어요?(Brunch Editor's Pick)

33화 : 울었다. 밥을 먹다 울었다.

34화 : 쿠팡의 시대, 동네마트 생존전략

35화 : 그렇게 마트가 된다

36화 : 가족같이 일하기 vs 가족이랑 일하기

37화 : 우리 동네 가장 소중한 가게가 되는 장사법

38화 : 현직 마트 삼촌입니다. 질문 답변드립니다

39화 : 군산에서 장사한다는 것

40화 : 사업... 나도 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