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욱 Dec 13. 2018

무른 귤과 아버지

귤의 계절이 돌아왔다

누군가는 이불 뒤집어쓰고 손이 노랗게 될 때까지 귤 까먹으며 영화 보는 것이 겨울의 존재 이유라 했다. 이쯤 되면 겨울은 귤의 계절이라고 해도 과한 말은 아닌 것 같다. 남녀노소 모두 부담 없이 좋아하는 귤이지만 귤은 의외로 보관이 까다롭다. 귤은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상자 안에서 하나라도 무르기 마련이고 하나가 무르기 시작하면 얼굴을 맞대고 있는 다른 귤들도 금방 따라서 물러지기 시작한다. 당도가 낮아서든 양새가 이쁘지 않아서든 아니면 그냥 재수 없이 그 시기에 소비자가 돈이 없어 선택을 받지 못하든 그 어떤 이유에서든 선택받지 못한 귤들은 결국 다 물러서 버려지게 된다. 오늘도 한 무더기의 귤을 버리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 마음도 이 버려지는 귤들과 같지 않을까. 어떠한 이유에서든 꺼내지 않고 깊숙한 어딘가에 박아놓았던 마음은 이 귤처럼 다 썩어서 버리게 될 것들 인지도. 물러버린 귤을 골라내는 심정으로 내 마음속도 한 번 열어봤다. 내 마음속 구석 어딘가 가장 깊이 박혀 물러있는 것은 아버지라는 이름의 귤이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는 내게 위인과도 같은 분이었다. 아버지는 판자촌 출신이셨다. 판잣집이 얼마나 부실한가 하면 태풍이 불던 어떤 날엔 지붕이 날아가버려 잠자던 와중에 빗물을 뒤집어쓴 날도 있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철이 들기도 전부터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다. 판자촌에서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 바쁠 나이였음에도 나이와 상관없이 리어카 행상부터 트럭 운전기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결혼을 하고 나와 내 동생을 낳으셨다. 어떤 상황에도 본인이 겪었던 가난만은 절대 대물림하지 않겠다며 제대로 된 휴일도 휴가도 없이 일만 하셨다. 그래서 나의 어렸을 적 사진 중에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리가 비워진 사진들은 내게 아쉬움이라기보다 오히려 자부심이었다. 우리 집이 어마어마한 부잣집은 아닐지라도 자수성가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분이 내 아버지셨으니까. 대부분 포기를 선택한 판자촌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오신 아버지를 존경했다.


하지만 내가 머리가 크고 나니 가장 존경하던 아버지와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대화를 할 때면 매번 벽과 얘기하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서 경영관리, 경영기획 일을 하면서 살아온 나의 세계에서는 어떤 의사결정이든 충분하고도 합리적인 논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논리보다는 직관이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기간 장사를 계속하시며 순간적인 의사결정을 체화(體化)하셨기 때문이다. 'A이기 때문에 B이다'라는 논리를 기대하는 내게 '뭐 그렇게 복잡해 그냥 B 지'라는 아버지의 직관론은 계속 대화를 헛돌게 만들었다. 헛도는 대화가 반복될수록 존경스러웠던 아버지의 모습은 점점 더 비합리적이고 무책임한 고집쟁이로 보일 때가 많아졌다. 아버지와 대화를 해보려 노력했지만, 그 시도는 매번 무력감으로 돌아왔고 그럴 때마다 더 퉁명스럽게 답하는 내 모습이 싫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얘기만 필요한 때에 하게 됐다. 그렇게 아버지와 대화가 점점 줄어갔다.   


눈이 많이 온 어느 날 아버지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 덮인 길거리에 남겨진 아버지의 발자국을 한 발, 두 발 따라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오랜만에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았다. 내가 살아오며 존경해오던 그 뒷모습이었다. 머리가 커지기 전만 해도 내가 그토록 닮고 싶었던 그 뒷모습이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파도가 휘몰아치는 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수영을 몸으로 체득하신 분이었다. 반면에 나는 책으로 영법을 배우고 수영장의 잔잔한 물에서만 수영을 하며 살다가 이제 막 바다에 발을 담갔을 뿐 실제로 거친 파도는 겪어본 적이 없었. 그러니 아버지의 방식과 나의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왜 팔은 90도로 꺾지 않으시는지 몇 번째 스트로크에 숨쉬기를 하지 않으시는지 그 이유와 논리를 따져봐야 애당초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아버지의 수영도 나의 수영도 결국 이 거친 바다를 헤쳐나가기 위한 여러 가지 영법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 누구도 무엇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차디찬 바다에 혼자 내동댕이 쳐진 것이 아니라 생존수영이든 수영장 수영이든 함께 이 바다를 헤쳐나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해졌다.


자식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아버지

얼마 전 조지 W. 부시가 아버지 장례식에서 읽었던 추도사 화제에 올랐다. 물론 아버지 부시의 죽음을 지켜보며 과연 그가 우리나라에 도움이 된 대통령이었는지, 그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정치인이었는지 따져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눈길을 걷던 내게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은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읽고 있는 조지 W 부시의 한 마디였다.

당신은 아들이나 딸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아버지였습니다.
The best father a son or daughter could ever have

추도사를 듣고 있노라면, 아들 부시와 아버지 부시는 왕래가 잦았고 미국인 특유의 사랑 표현을 자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살아생전에도 아버지 부시에게 '아버지, 당신은 최고의 아버지입니다(Father, you're the best father a son or daughter could ever have)'라고까지 말했을지는 의문이다. 장례식장이 아니라 아버지 부시가 살아계시던 어느 날 갑자기 그 말을 했다면 아버지 부시도 아들 부시도 모두 한 번 더 따뜻하게 웃을 수 있지 않았을까.


박스 구석에 박힌 귤은 결국 물러져 버리게 된다. 구석에서 제때 꺼내지  않는 우리의 마음도 결국 물러져 버린다. 그러니 표현을 아끼지 말자. 너무 늦게 마음을 꺼내지 말자.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감사하면 감사하다고. 오늘만큼은 내 마음이 다 물러지기 전에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꺼내놓고만 싶다.


당신은 언제나 내게 최고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Executive Summary : 
오빠랑 지게차 타러 갈래? (안정적 기름집 김 씨는 왜 불안정적인 마트삼촌 김씨가 되었을까) 


1부 - 대퇴사시대

0화 : 대퇴사시대, 도대체 왜 퇴사하세요?

1화 : Professionalism, 멋있잖아요

2화 : 노인의 얼굴에 나이테 대신 동심이 내린 이유

3화 : 내가 만난 '난놈'들의 공통점

4화 : 진짜 히치하이커는 엄지를 들지 않는다

5화 : 틀린 인생은 없어 다르게 살아도 괜찮아

6화 : 꿈을 강요하는 사회

7화 : 일출 보러 가다가 퇴사결심

8화 : 새장 속의 새는 새가 아니다(Brunch Editor's pick)

9화 :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10화 : 사직서를 준비하는 네가 알면 좋을 세 가지


2부 - 소상공인 라이프 소상히 알려드립니다.

11화 : 가라앉을 것인가 헤엄칠 것인가

12화 : 고객관리의 핵심은 메아리다

13화 : 그대, 존경받아 마땅한

14화 : 네비 있으세요?

15화 : 이 길로 가는 게 제대로 가는 걸까

16화 : 행복하자. 아프지말고.

17화 : 영민할 것인가 따뜻할 것인가

18화 : 우리 동네에서 가장 소중한 가게

19화 : 모범생 남 대리가 사업을 말아먹은 이유는

20화 : 칼퇴할 수 있고 주말근무 없으면 워라밸일까?(Brunch Editor's pick)

21화 : 왜 장사하는가?

22화 : 이 가게, 한 달에 얼마 벌까?

23화 : 사장님, 이렇게 팔아서 남아요? - 박리다매 경제학

24화 : 진상의 평범성(Brunch Editor's Pick)

25화 : 가장 오래된 빵집, 이성당이 잘 나가는 이유

26화 : 유해진에게 배우는 싸가지경영

27화 : 무른 귤과 아버지

28화 : 백종원이 말하는 장사 마인드

29화 :  이 식당은 50분만 일하면 한끼가 무료입니다

감사인사 : 꿈 하나를 이루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이성당 사장님을 만났어요)

30화 : 성심당은 파리바게뜨가 부러울까?

31화 : 그 자켓을 사지 말라던 파타고니아의 오랜 진심

감사인사 : 또 하나의 꿈이 이뤄졌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감사합니다

32화 : 어쩌다 대기업 그만두고 마트를 하게 됐어요?(Brunch Editor's Pick)

33화 : 울었다. 밥을 먹다 울었다.

34화 : 쿠팡의 시대, 동네마트 생존전략

35화 : 그렇게 마트가 된다

36화 : 가족같이 일하기 vs 가족이랑 일하기

37화 : 우리 동네 가장 소중한 가게가 되는 장사법

38화 : 현직 마트 삼촌입니다. 질문 답변드립니다

39화 : 군산에서 장사한다는 것

40화 : 사업... 나도 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