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하반기를 맞이하며
사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퇴사하고 이렇게 진지하게 여러방면으로 회고하는 건 처음이다.
회고라고 해도 항상 회사 욕이나 했지.
퇴사 통보 후 퇴사일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니.. 잠깐만, 사측에서 보험료도 못내고 있고, 월급도 그렇고 연차수당을 줄거라는 기대를 할 수가 없잖아. 더 피곤한 일 만들기 전에 그냥 나가는게 나을 것 같아서 미연차 소진을 한다고 했다. 퇴사수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행히.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많이 협업한 사람은 선임이다.
이 사람에게 여태까지 일하면서 업무적인 것을 정말 많이 배웠다.(영어로만 대화하니까 영어가 특히!)
입사 초기에 내가 적응하는 게 많이 느려서 방치하는건가??싶을 정도로 기다려주기도 했고.
그리고.. 항상 무덤덤해서 왜 안 혼내지? 싶어서 한번은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왜 나한테 화 안 내? 라고 물어보니 "?? 화낼 이유가 있어? 문제 해결하면 되는거야." 라는 대답이 정말 신선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서로 성격이 정말 안 맞는 부분 있었는데 워낙 무덤덤한 사람이라 잘 조율은 했지만.. 인간관계는 어려워. 그렇지만 많이 배웠으니까, 그렇지만 업무소통이 정말 사회생활 하면서 역대급으로 심각하게 안되던 건 아직도 답답하다. 아무리 개발자라는 직업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래..도 업무가 덜컹덜컹 흘러간다는 것도 신기하고.
선임에게 전달할 작업했던 많은 파일들을 정리하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나기 시작했다.
클라이언트의 예상치 못한 갑질 그대로 이행하며 야근하던 날들, 하루에 화장실 한두번밖에 못갔던 날들, 입사 초기에 어떠한 인수인계도 받지 못해서 혼자 엄청 헤매던 날들 등등, 그래도 열심히 달려왔었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어서 진짜 마지막이구나, 시원섭섭한 기분도 들었고.. 약간은 나 퇴사하면 다 흐지부지일텐데 열심히 일해주지 말걸^^! 하는 나쁜 생각도 잠깐 들었다.
퇴사 전에 선임에게 메일로 '안녕! 그동안 같이 일하면서 덕분에 많이 배웠고 고마웠다' 로 시작하는 글과 함께 정리한 파일을 보냈고, 돌아온 메일에는 '안녕! 나도 너랑 일하면서 좋았어! 앞으로도 행복하길.'라는 짧은 대답이 담겨있었다. 읽자마자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퇴사하는거 큰 실수를 하는 것 같은 이상한, 낯선 기분. 내 몸은 꽁꽁 얼어있는데 따뜻한 물이 닿은 느낌. 뭐지? 이게 시원섭섭하다는 느낌인가? 여태까지 수많은 회사를 퇴사하면서 이런 기분이 든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다. 이별한 느낌?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 엉켜있는 상태여도 이별하는 건 시원섭섭할 수 밖에 없는걸까. 정말 낯선 경험이야.
그리고 따돌림은 아니지만 미묘한 따돌림을 당한 건 맞았다. 그리고 주동자는 낙하산이었고, 내가 다른 직원들을 심하게 오해했었어. 아래에 개선점에 쓰겠지만 심한 스트레스 상태일 때 인지왜곡이 생겨서 피해망상을 했던게 맞았다. 진짜 내가 너무 싫어졌다.
아무튼 낙하산은 내가 마지막으로 퇴근시간이 되고 사람들과 인사를 해도 무시를 하고 있었다. 네 그렇게 사세요 뭐...나도 그쪽 진짜 싫어요. 안 맞아...
많은 사람들이 입사하고 퇴사를 한 회사였다. 잠깐이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물론 좀 많이 이상한 사람도 만났었지만 서로 좋았든 싫었든 나에게는 많은 거름이 되었다.
아무튼 되돌아와서, 비록 마지막이 별로인 회사였지만 회사생활 하면서 얻은 것과 개선해야 할 점을 정리하고 회고를 마치기로 한다.
- 정말 적당한, 남들만큼의 사회성.
- 영어, 업무스킬, 검색능력
- 체력, 코로나 바이러스
- 메모, 내용 정리 잘 하는 스킬
-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인지왜곡이 되는 걸 되도록이면 알아차리려고 할 것
(아직도 남들보다 스트레스에 너무 취약해서 신체로 나타나서 정신을 못차린다. 고칠 수 있을까, 전문가의 치료가 필요한걸까.)
- 아주 가끔 이러는데, 두려워 하지 말고 물어보고 싶은 것은 물어볼 것, 이것을 미루지 않을 것.
- 이것도 아주 가끔 이러는데, 부당한 일이 있거나, 이의제기를 해야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말해도 들어주지 않을텐데..하지 말고 한 마디라도 할 것. 나를 위해서 혹은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그래서, 2023년 하반기가 시작되었는데 환승이직도 안 하고 그대로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 뭘 할까.
해외여행을 짧게라도 다녀올까했는데 일단 3일만 신체 점검하러 병원 다니고, 당분간 긴축재정을 위해 알뜰하게 생활할 준비를 해야지.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잘 버틸 수 있을까. 우울증의 잔해때문인가 벌써부터 이런저런 걱정이 드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니 현재에 충실하기로.
1년 6개월동안 혼자서 남들에 비해 얼마 되지 않은 경력으로(사실 입사한게 제일 신기하다) 디자인, 프론트단을 쳐낸 나를 많이 다독이게 되는 밤이다. 나에게 매정해지지 말고 조금은 다독여줘야지. 내가 내 가족들, 친구들을 아껴주듯이 나도 나 스스로를 말야. 사측이 내 업무능력을 어떻게 평가를 하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다른 직원들도 입을 모아서 혼자 너무 고생한다고 했을 정도로.
많이 시원섭섭하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갑시다. 아직 살 날은 길고 내 불안요소는 아직도 너무 많아 살다가 또 나자빠진다해도 나는 지칠 때마다 죽을 생각만 하지만, 그렇지만 살고싶어하는 생물이니까.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