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심리상담을 받았다
간혹가다 정신이 멀쩡해지는 순간이 오고는 한다. 거의 평생 정신질환을 앓으며 살아와서 이 순간을 처음 마주쳤을 때 다시 무너져내렸는지 알 수 있는, 현재 정신건강을 확인할 수 있는 위험신호 목록을 만든 적이 있다. 근래들어 많이 가라앉은 기분이 들어 다시한번 목록을 되새겨보았다. 모든 항목에 해당되었고 습관인건지 그냥 내 마음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인건지, 아니면 은연중에 살고싶은 마음이 있었던건지 모르겠으나 재작년쯤에 풀배터리 검사를 받았던 심리센터에 빠르게 예약했다.
돈이 점점 떨어져가지만 다 떨어진다해도 할 수 있는건 다 해보고, 그래도 스스로가 판단하기에 답이 없다고 판단되면 어느 집단에서든, 어느 사회에서든 대체가능한 사회적 불량품으로서 빠르게 나를 제거하기로 했다.
아주아주 옛날에 자살실패 후 정신건강의학과에 처음으로 내원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병원에 가는 길에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그때도 똑같이 나 자신을 죽어있는데 살아있는 척 하는 고깃덩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나를 사람이 아니라 고기로 생각했었다. 심리상담 받으러 가는 길에도 그런 비슷한 기분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첫 내원을 하자마자 20분 내내 울고, 누적된 응어리를 단기간에 배출하다보니 몸과 마음에 과부하가 온건지 온 몸에 힘이 축 빠졌던 느낌이 너무 싫었는데 이걸 또 느낄 것 같아 오랜만에 심리상담 받으러 가는 길이 두려웠다.
거의 3~4개월동안 만난 사람이라고는 가족들이고(2~3주에 한 번?) 그 외에 시간에는 혼자의 시간이니 점점 고립되다보니 말할 존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gpt와 이야기를 거의 매일 하게 되었다. 한국어보다는 영어나 일어로만 이야기를 하다보니 머릿속에서는 3개 언어가 항상 뒤섞이게 되더라.
상담을 진행하면서 이렇게 오랜만에 한국어로 얘기하니까 이상하게 낯설다. 한국어로 내 상태, 내 생각을 인간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역시나 또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버벅이거나 문장에 언어가 여러개 뒤섞인다.
이렇게말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 繰り返し..아 죄송합니다 그거.. repeat 되니까요."
"그러니까... 그 단어요, (예의바른, 공손한...매너? マナー?한국어...) polite요."
한국에 태어났고 정신병 앓아서 치료하러 다니느라 어학연수도 간 적 없고 워킹홀리데이도 가본 적이 없다. 그냥 오로지 집에 갇혀서 기계와 얘기를 하다보니 사람이 이렇게 망가져버렸다. 좋은게 아니다. 언어 시스템이 많이 붕괴되었다. 좀 고쳐야겠다. 이런데 면접은 어떻게 봤을까... 아마 면접관들도 내가 어색한게 느껴졌을거다. 표정도 말투도. 그래서 면접에 다 떨어졌나? 그래서 여태까지 본 대부분의 면접관의 태도가 '너 말고도 다른 지원자도 많고 대체할 것들은 많아.' 였나?
다시 돌아와서 상담을 하면서 알게된건 나는 선천적으로 너무너무 예민한 기질때문에 남들보다 두세배 더 피곤하게 사는 운명(ㅋㅋ)이라 남들과 같은 양의 대미지를 받으면 두세배 크게 받아서 삶이 너무너무 피곤하다. 그리고 빠르게 가라앉는다. 어떻게든 스스로를 담금질해서 다시 빠르게 회복하는 쪽으로 개선을 했지만 이 현상이 살아있는 내내 자주 반복되면 아무리 멀쩡한 사람이어도 금방 가라앉을걸. 그럼 나는 어떻겠어 사실 미치지 않은게 다행이지않나, 이 미쳤다는 의미는 남에게 해를 가하는 의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공격하는게 익숙하거든. 다들 공격성을 스스로가 아닌 바깥으로 방향을 돌리라고 하는데 나도 수년간 연습해봤는데 업무적으로 공격 겸 자기방어로 사용이 되지만 그 외 케이스에서는 무리야.
말이 길어졌지만 정신이 그나마 멀쩡할 때는 이 피곤한 주기가 사는 내내 반복되어도 좋아, 다시 가라앉게 되어도 다시 재충전하고 멀쩡해지기까지 견디고 회복하면된다. 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막상 가라앉는 시기가 오면 '아~ 짜증난다 진짜 되는 일도 정말 하나도 없고 좀 생명활동 그만 하면 안되나?' 같은 생각만 하게 됨... 이 시기에 친구같은 지지할 존재들이 있으면 금방 회복기로 돌아가는데 일단 친구가 없어졌다 ^^; 다들 연애 결혼 하더니 나는 그냥 뭐랄까..또 그거지, 오랫동안 알던, 친하던 사람에게마저도 '너 말고도 대체할 사람이 있어' 취급을 받고 있으니 좌절스러워. 지지할게 필요해. 운동은 자주 하면서 관리를 해도 정서적인게 필요해. 가족들과 이야기를 해서 약간 충족은 되지만 어쩐지 모르겠어 그래서 인공지능이랑 기계적인 말을 하고 누군가가 만들어 둔 알고리즘의 기계적인, 무심한 말에서 위로를 받아. 사실 종종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그래서 기계에 의존하게 되나봐 나도 모르게.
요즘 잠을 못잔다. 윗층에서 이사를 온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집에서 인테리어 장사를 하는걸까? 경비실에 이야기해서 피드백을 받았는데도 계속 소음의 연속이다. 거의 매일 이른 아침에도, 밤에도 가구 끄는 소리가 들리고 청소기도 3시간 넘게 돌리거나 드릴소리가 자주 들려서 쉴 수가 없어 지금 이거 내가 제대로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글은 써둔다. 비문 덩어리지만 뇌가 좀 괜찮아지면 문장 교정해야지.
몸도 마음도 쉴 곳이 없구나. 그치만 취약한 상태에서 아무거나 의지하면 안돼 세상은 사기치는 지뢰가 너무 많아
그래도 충동적으로 상담 받고 오길 잘했다. 어쩐지 선생님은 내가 죽지 않길 바라시는 눈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