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아토르 Sep 26. 2017

당신의 순간들

사랑1

수많은 이야기 끝에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당황스러웠다.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생각이 멋지다거나 심지어는 옳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옳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당신의 생각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멋들어진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그저 동경에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라는 사랑의 대상에 대한 바람은 사실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 사랑은 그렇게 이성적일 수가 없다. 생각이란 것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당신이 말한 내용들이 아니었다. 말할 때 당신의 눈빛, 목소리, 손짓, 작은 고갯짓, 그런 것들을 나는 사랑했다. 그리하여 시간이 아주 지난 뒤에도 당신의 한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 때 그 순간의 모습들이 조각조각 마음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때는 미처몰랐다. 그의 뒷모습이 이렇게 마음에 남을 줄은. 마주치고 웃던 그의 눈이. 그만의 목소리와 말투가. 글씨를 쓸 때면 더 눈이 가던 정갈한 손톱이 이렇게 오래 잔상으로 남을 줄은. 문득 문득 떠오르는 그 순간들이 햇볕처럼 쨍하고, 노을처럼 물들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당신은 모른다. 당신도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의 그 순간들을 내가 이렇게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걸.


사랑이 생각이 아니라 풍경이어서 슬프다.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맺고 끊는 것이 아니라 사진처럼 마음에 남아서 언제 어디서든 문득 떠오르는 것이어서 아리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눈과 귀에, 손과 마음에 박혀있는 것이어서 오늘도 나의 모든 순간에 당신이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조용한 봄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