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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가르타 Apr 11. 2016

헤어지고 3개월이 지나갔다

상대방에게 내가 상처 줬음을 인정하기까지

헤어지고 겪는 고통스러운 감정의 실체는, 그 사람과 내가 분리됐다는 사실이기보다는
‘그 사람이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라는 현실 부정의 감정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다’라는 것을 인정한 순간 나는 거짓말처럼 편안해졌으니까.


헤어진 직후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은 내가 상처받았던 말들과 상황만을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되풀이하기 때문에 이별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 사람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뒤죽박죽인 수개월의 시간을 지나 그 사람에게 내가 준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비로소 이별의 족쇄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다. 헤어지자마자 제 빨리 환승해버리는 사람들에게 뒤탈이 일어나곤 하는 이유는 이토록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을 놓쳐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줬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나를 떠날 수 있다’

이 사실을 머리만이 아닌 마음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기까지 3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그제야 이별 속을 살던 내게 일상의 다른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3개월의 시간 동안 나는 머릿속에서 그 사람과의 추억을 모두 삭제하고 싶었고, 새로운 연애로 잊고 싶기도 했다. 시간을 되돌려 보고 싶기도 했고, 한 달 만이라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런 일들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고 이별의 파편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인고의 3개월을 보낸 것이 지금으로서는 너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사람과의 모든 기억을 삭제한다면 나의 연애에는 발전이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나는 새로운 연애를 할 자격이 없었다. 시간을 되돌려도 똑같은 문제로 헤어질 것 이었고, 한 달 동안 잠에서 깨지 않았다면 큰일이다.


연인에게서 부모의 사랑을 기대했다면, 내가 들어도 상처일 말을 서슴없이 했다면 그래서 상대가 떠나갔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다만 슬픈 것이 있다면 내가 마지막으로 목도한 기억 속 그 사람은 나로 하여금 상처 입은 모습이었고 영원히 내 안에서 그 모습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나라는 사람이 치유해줄 수 없는 영역의 것이 되어버렸다. 떠난 그 사람은 그것을 원치 않을 테니까.


3개월이 지났을 뿐인 지금도 이별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시시때때로 변덕을 부리는 것이 이별한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에 나는 몇 개월 뒤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될지 도 모른다.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이별의 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전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괜찮아졌구나 싶다가도 느닷없는 그 사람과의 추억의 일격에 아플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고 쉽게 새로운 연애로 도피하지는 않으려 한다. 이 고통스럽기도 지루하기도 한 이별의 과정은 더 성숙하고 건강해질 다음 연애를 위한 필연적인 경험인 것 같기 때문이다.


꽉 찬 3개월이 지나갔다. 죽도록 힘들었지만 살아가면서 겪을만한 가치가 있는 고통이었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람을 원망하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은 무너졌고 깨진 그릇을 다시 붙이는 것처럼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2016. 4. 4 월요일

나를 사랑해줬고 사랑이 끝난 후에는 나를 철들게 한 너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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