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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가르타 Jun 10. 2017

내 연애의 정체성

사랑받는 여자가 아니어도 괜찮다

'나는 나 좋다는 사람이 좋아'라는 말을 흘리며 피동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여자들이 꽤 있는데 이는 일종의 방어기제일 뿐 정말로 지극히 나를 좋아해 주는 남자만을 선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여자들이 자신의 연애에 대한 자율성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잘 생긴 남자가 좋아

세상이 많이 변했다지만 아직까지도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어떠한 남자를 선호한다는 의사를 표현한다는 것이 남성들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남성들이 '예쁜 여자'를 선호한다는 사실은 거부감 없이, 매우 공공연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반면, 여성이 능력이나 출중한 외모 등을 갖춘 남성을 선호한다고 당당히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미묘하게 불편한 시각이 존재한다.

일례로, 능력 있는 남성을 선호하는 여성들에게 '된장녀'라는 멸칭이 붙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여성들의 외모를 품평하고 따지는 남성들에 대한 멸칭은 따로 존재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본능'이라며 사회적으로 이해하는 분위기다.


한창 미디어에서 요리하는 남자들이 나오고 그들이 대세로 떠올랐을 때 일각에서는 불편을 표현하는 여론도 있었다. '이제 남자는 요리까지 잘 해야 하느냐!'하는 일부 남자들의 항의였는데, 사실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요리를 필수 덕목으로 갖추라고 하지도 않았고 단지 요리하는 남성들의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는 을 숨기지 않았을 뿐이었다. 일부 남성들이 불편해했던 지점은 여성들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며 선호하는 남성상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의 선택에서 스스로가 도태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두려움도 엿보였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평가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남성들이 간과하는 점은, 그동안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그렇게 해왔다는 것이다.


지금 것 나와 만났던 남자들 중, 나에게 "요리 잘 해?"라고 물어보지 않은 남자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에게도 "돈 잘 벌어?"라고 물어본 적이 없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된장녀 소리를 듣게 될 테니까.


연애할 땐 여자가 갑이어야 한다?

내가 많이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많이 좋아하지 않는 상대와의 연애라는 것이 특히 여자들에게 위험부담이 크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부분 또한 설명이 필요하다.


'여자는 자길 좋아해 주는 남자와 결혼해야 행복하다', '남자가 더 사랑해야 좋다', '여자가 너무 좋아하면 남자가 질려한다' 등 애정의 크기가 여자 쪽으로 더 기울어 있으면 여자가 관계의 을로 전락하면서 연인관계의 유지가 어렵다는 류의  누구나 심심찮게 들어봤을 것이다. 이것은 여성들의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부추기는 괴담에 가깝다.


어디 그뿐인가? '여자는 곰보단 여우 같아야 한다', '스킨십 진도를 빨리 빼면 남자가 쉽게 싫증 낸다', '여자는 다 보여주면 안 된다', '여자가 적극적이면 남자가 부담을 느낀다' 등 이상할 만큼 연애에 대한 떠도는 지침, 그러니까 남자의 입맛에 맞는 여자 되기 레시피와 같은 것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소비되고 여성들에게 편향되어 있다. 남자의 애정을 최대한 뜨거운 상태로 오래 유지시키기 위한 여자의 연애지침이라니 너무 크리피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여자의 사랑을 최대한 오래 지속시키기 위한 남자 되기 레시피와 같은 것이 이토록 공공연히 떠도는가? 비교적 적게라도 존재한다고는 해도 여성에게 요구되는 것만큼 다양하며 억압적이고 자기기만적이진 않다. 기껏 해봐야 '표현을 잘해라'와 같은 1차원적인 것들 뿐이다. 표현을 잘 해야 한다는 건 연애의 비법이라기보다는 '회사에서 잘리지 않으려면 무단결근을 하지 말아야 한다'처럼 아주 기본적인 부분이다.


그만큼 여성이 남성의 애정의 정도에 기대는 부분이 크다는 것이고 그 까닭 중 하나는 앞서 말한 상대적 위험부담일 것이다. 위에서 예시로 든, 연애에 있어서 수동적일 것을 요구하는 지침들은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한 형태이기도 하지만 남성보다 여성이 안전, 경제력, 사회의 잣대로부터 불리한 점도 여성들의 연애 선택에 큰 영향을 끼쳐왔을 것이다.


상대가 폭력적일 가능성, 계획 없는 임신을 할 가능성, 이혼을 하게 될 가능성(여자가 남자보다 경제권 퇴출이 빠르고 육아를 해야 하는 전업주부의 경우 이혼 후 경제적인 독립에서 불리), 상대가 친구들에게 나에 대한 음담패설을 할 가능성, 각종 데이트 범죄를 겪을 가능성, 결혼 후 사회에서 겪게 될 불이익 등 대부분의 상황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여자들은 더더욱 남자의 애정도에 의존하게 되며 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따라올 수 있는 위와 같은 변수를 줄여보고자 하는 불안감을 무의식 중에 가지고 있어, 내가 열렬히 좋아하는 상대를 찾는 대신 나를 열렬히 좋아하는 상대를 찾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를 해치거나 배반할 가능성이 적은 안전한 남자 혹은 나에게 안전과 안락함을 제공해줄 남자의 조건 등을 그 밖의 다른 부분들과 함께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여성들에게는 생존이 걸려있는 문제다.


연애관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남녀 간의 입장 차이는 남녀의 사회적으로 다른 위치와 그 배경에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연애에 있어서 상대의 주체성에 의존한 수동적인 포지션이 안전하리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는 건 조금 슬프지 않은가?


그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날 자신이 없어

사실 '남자가 더 사랑해야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관계'와 같은 말에 동의하는 시선은, 얼핏 보기에는 더 사랑하는 쪽이 불리할 것 같지만 관계의 열쇠와 권한을 남자에게 쥐어준다는 의미다. 여자는 선택하고 스스로 취하는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선택되는, 간택되길 기다리는, 상대적으로 자주성이 결여된 '대상'에 가깝다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지 않은가?


헤어진 여자들이 '그 사람만큼 나를 더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날 자신이 없어'라며 슬퍼하는 안쓰러우면서도 기이한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왜 많은 여자들이 이별 후 스스로가 상대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보다, 상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해주었는가를 더욱 아쉬워하는지에 대해 사회적 맥락에서의 해석이 필요하다. 상대가 나를 얼마나 생각하며 위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느라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너무도 많이 놓치고 있다. 친구의 연애와 나의 연애, 친구의 파트너와 나의 파트너를 비교하게 되는 실수는 대개, 연애를 나의 시선에서 보고 그 의미를 두기보다는 파트너 시선에서의 연애에 더 큰 의미를 두는 오류에서 온다.


연애 중일 때에도 이별한 후에도 상대에게 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집중했다면 나에게 상대가 무엇이었는지도 심도 있게 사유해 봐야 할 것이다.

내게 가지는 파트너의 의미, 내가 느끼는 감정,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내 연애의 정체성이지, 파트너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고 어떻게 정의 내렸으며 어떤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주었는지는 파트너의 것일 뿐이다.


어떤 연애를 선택하는가는 자유지만 본인이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보다 상대가 내게 보여주는 감정을 우위에 두고 그것이 연애의 질을 결정하게 한다면 내 연애에 대해 더 심도 있게 성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함으로써 얻는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


끝으로 내가 이 글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말은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당신은 괜찮다는 것이다.



2016.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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