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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솔길 Aug 24. 2018

양다리

부처님 손바닥안

아무 기운도 없고 힘도 없는 원영은 그래도 꾸역꾸역 일어나 매장에 앉아 빈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멍하니 있다. 아무래도 벌을 받는 건가 싶었다. 신상 촬영을 그냥 밀고 부치고 할 걸 그랬나 싶었다. 늘어지기만하고 괜히 우울하고 못된 짓을 하면 그 만큼 되돌아오는 건가란 자괴감이 들었다. 그 때 AMI 모델 에이젼시로 부터 문자가 왔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9월에 촬영 가능한 저희 소속모델들 컴카드와 엑셀파일 보내드립니다 :)

(9월 중순 모델들 입출국 관계로 변동생기오니 관심 기울여 주세요~!)

이미지에 맞는 모델이 있으 편하게 문의 바랍니! 코디네이터 성채연 드림


원영이 채연으로부터 온 메일을  무시하고 스케치북을 펼치고 모델 기본 뼈대 밑그림을 그리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상혁이다.


"잘 지냈냐?"

"오~ 나야 디자이너로 잘 살고 있지."

"그래? 나 얼마전에 스튜디오 세트 새로 짓다가 잘못해서 발 다쳤어, 우리집에 죽 좀 사가지고 와주라. 같이 먹자."

"미안한데 나도 지금 아파. 너 아프다니까 안됐긴한데 나도 지금 너무 힘들어서 한약방가서 침 맞고 싶은데 참고 출근했거든."

"그래, 너도 바쁜데 시간 뺐어서 미안하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원영은 마저 밑그림 스무장 묶음을 모아 클립 보드에 가지런히 꼽았다.


촤악 커튼이 펼쳐지고 모델이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안 쪽 피팅룸에는 업체 사장님과 원장님, 대표님의 디자인 잔치가 시작했다.

 

업체 이사장님이 말한다.

"네크라인 브이 괜찮을까요?"

대표님이 말한다.

"앞도 브이 뒤도 브이, 앞 뒤로 팠는데?"

만족했는지 이 사장님이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다시 묻는다.

"이거 라인이 뭐에요?"

원장님이 말한다.

"안은 머메이드라인 밖은 A라인, 라인이 두 개에요."

"안밖 다 라인 A로 통일시켜주세요."

"이거 왜 이래?? 패턴 내가 뜬거야~"

"안돼요. 허리부터 A로 해주세요."

원영이 주문서에 스케치를 하다가 눈치없이 끼어들었다.

"어? 그럼 엠파이언데, 엠파이어가 말이 엠파이어지 막상 입으면 예쁘기 힘들어요."

"노노, 엄파이어 노노. A라인이에요, 허리부터요."

이 사장님은 예민하게 집게 손짓을 했다.


대표님은 원영이 그려놓은 주문서를 뺐어서 기껏 그려놓은 머메이드라인 위에 길게 A라인을 두꺼운 마카로 덧그리더니 또 다시 브이라인을 더 깊게 파서 그렸다.


이 사장님은 맘에 드는지 아무 말 없이 원단으로 화제를 돌렸다.


"안감이 미카도였었는데?"

"반짝이가 더 예쁘죠."

듣고 있던 원영은 다시 반짝이를 그림에 그려넣었다.

"됐어요. 이거 언제까지 되죠?"

"추석 전에 빼주세요."

"으음~~ 최대한 맞춰드릴께요."


    원영은 전화를 끊고 나서 달력을 보았다. 이제 곧 있으면 추석인데 올 해도 집에 못가고 일해야겠구나 아픈 몸에 코를 훌쩍였다가 그럴 새가 어딨냐며 원장님이 심부름을 시켰다.


"원영아, 아까 지인이  복숭아를 들고 오셨는데 좀 먹을래?"

원영이 한입 베어물자 맛있다.

"오~~~"

"왜, 셔??"

"아뇨~~ 부드럽고 달아요."


이 원장님도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애써 그린 건데 망쳐서 어째~~"

"에이 디자인은 대표님이 하시는 건데요 뭐, 전 주문서나 좀 끄적이는 수준인데요, 스크랩만 따로 해놓으면 되요.근데 복숭아 쪼끔 시네요."


오더가 끝나고 남은 펄럭이는 주문서를 바라보며 원영은 오늘 하루 비록 몸도 고되고 머리도 깨질것 같았다.


속으로 '이런 옷은 제시카 고메즈나 안젤리나 졸리가 입어야 소화 가능할텐데..'


그때 이 사장님이 말했다.

"수선은 어떡하죠?"

"그건 꽁짜로 해드려야죠."


원영 눈이 동그래져서,

"수선비는 납품 이 후에는 따로 받는거 아닌가요?"

대표님은 손사레를 쳤다.

"아닙니다. 점심 드시고 가세요. 사드릴께요."

"아니에요."

이 사장님이 역시나 손사레를  쳤다.

아무 말 못하고 원영은 묵묵히 낙서로 얼룩진 스케치 북을  가지런히 접어 열 십자로 찟어버렸다.


패션 학원에서 배울 때와는 달리 막상 클라이언트와 최종 디자인이 나올 때는 자신의 이론 따위는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원영은 깨달았고, 어쨌든 자신만의 스크랩은 하나 남겼고, 복숭아의 맛은 좋았다.


이게 아닌데, 내가 고지식한걸까 선무당이 사람 잡는 걸까?그래, 내가 벌 받는거 맞나보다 싶어  원영은 기분이 영 찜찜한데 마침 상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스튜디오 한번 안 올래? 이모가 와서 죽을 끊여 주고 갔는데 같이 먹자. 너가 정하기 싫으면 촬영은 안해도 되, 나도  미안해서 그러지."

"아냐~~  나도 가려고 그랬어. 주소 찍어 봐."


원영은 상혁이랑 그렇게 화해를 했다. 아니, 찍으려다 만 화보 촬영을 마저 찍어야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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