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주는 선물
월화수목금금금 같은 날들의 연속이지만 쉬려고 마음 먹으면 또 쉴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쇼핑.
멀리 산과 들이 있는 교외로 나가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동네 찜질방 가는 것도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예전엔 한강 유람선도 타보고 양평 어딘가 쯤에서 오리 보트도 타며 좋아라 했던 것도 같은데 까마득하게만 느껴진다.
물론 일로 만남 전무님과 상무님과 얼마 전에 소맥도 말아 먹고 회도 먹고 호텔 방에 들어 앉아 프링글스 감자칩에 하이네켄과 타이서 맥주를 한 캔씩 따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업무의 일선상에 속한 얘기다.
스케치북이 다 떨어졌다.
테이블에 퍼질러 앉아 있다가 디자인 스케치를 하려고 보니 하얀 도화지가 겨우 한 장 달랑 남아 손 때 묻어 더렵혀진 채 보잘 것 없이 초라하다.
연문은 오피스 문구점 진열대 앞에 서서 두툼하고 튼튼한 연습장을 뒤적인다.
청색 하드 커버에 노란색 고무줄 띠가 달린 페이퍼 패드 하나.
빨간색 아트 커버에 실용적인 화이트 페이퍼가 빽빽한 패드 둘.
초록색 과자 상자 도화지 재질에 까만 플라스틱 스프링이 촘촘하게 엮여 있는 종합장 셋.
욕심이 난다.
세 개를 다 사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를 다 쓰고 난 후에 필요할 때 또 다른 하나를 사는 게 더 낳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과감히 첫 번 째 걸 집어 들고 계산을 하러 지갑을 꺼내는데
그 때 전화가 걸려 온다.
"지난 주에 판매 디피 했던 디자인들 16점 이지? 그 중에서 1번이 빠졌더라. 그거 얼른 그려서 팩스로 보내. 지금 손님 왔으니까 빨리!"
"네. 네."
연문은 테이블 앞에 앉아 주섬주섬 필통에서 색연필과 싸인펜과 붓펜을 꺼내 가느다란 롱 테일의 실크 드레스를 그린다. 소매에 달린 프릴을 강조하다보니 라면 면발처럼 구불구불 곡선이 강렬하다.
주말이라 쉴 줄 알았는데 역시나 박전무의 명령은 폭풍처럼 휘몰아 쳐서 연문의 혼을 속 빼놓는다.
땀을 삐질거리며 팩스를 보내고 의자에 털썩 앉아 한 템포를 늦추고 나니 휴대전화만 덩그러니 손 옆에 지키고 있다.
언제까지 일만 하고 살아야하나 싶다.
오늘은 기필코 술이라도 한 잔 마셔야 겠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연락할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
승원이는 착하니까 날 받아 줄지도 몰라 하며 전화를 걸어 보지만 그 역시나 받아 주지 않는다.
사회초년생 직장인 동호회 모임에서 친구의 친구, 그 친구의 친구, 그 친구가 데려온 친구 그렇게 소그룹으로 만나 이꼴저꼴 볼 건 보고 안 볼 거 안 본 사이가 되었기 때문에 더 잃을 게 없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뜨거운 차이라떼를 테이크 아웃해 왔다.
그리고 아직도 그려야할 수북하게 쌓여 있는 디자인 레퍼런스들과 선별 자료 정리 알카이브 작업이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다가 갑자기 젖가슴 한 쪽이 가려움을 느낀다.
아마도 가슴 마사지를 해 줘야 할 듯하다.
브래지어 후크를 풀러 양 손으로 주물럭 거리다가 어쩐지 오묘한 기분이다.
괜히 울렁거린다.
입에서 침이 고인다.
한참 동안 알수 없는 고독한 오르가즘을 느끼다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멕 라이언 처럼 혼자 괴성을 지르며 액스터시를 느끼고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또 스케치북에 붓 펜을 들고 끄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