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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트루 Jul 03. 2019

끝내 주지 못한 명함들

처치 곤란한 명함처럼 내 인생도 처치곤란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다들 명함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분리수거해서 버리나? 아니면 하나하나 찢어서 일반 쓰레기봉투에 버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명함들만 멍하니 바라본다. 덩그러니 서랍 속에 남아도는 이제는 쓸모없는 두 개의 다른 명함들을 바라본다. 문득 아련하면서도 가슴 한쪽이 답답해져 온다.

나 이대로 괜찮은 걸까?



유난히 회사 위치와 운대가 안 맞았다. 긴 통근 시간으로 회사를 그만뒀다. 핑계라면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나름 썩 괜찮은 핑계라고 생각했다. 첫 직장은 삼성역에 있었는데 집에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꽤 괜찮은 접근성이었다. 적어도 인천에 사는 사람들한텐 양호한 편이다. 그런데 심심찮게 들려오는 회사 이전 소식에 불안했고 아니나 다를까 그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문정역으로 회사를 이전했는데 통근시간만 도어 투 도어로 3시간이 걸렸다. 울며 겨자 먹기로 출근을 몇 개월 해봤지만 새벽 5시 기상은 그냥 그만두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렇게 첫 직장과는 거리 문제로 그만뒀다. 물론 다른 이유도 많았지만 회사에 그만둔다고 할 때 거리 문제만큼 좋은 이유 거리도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만두라는 신의 계시쯤으로 생각했다.


두 번째 직장은 상암이었다. 여기도 뭐 괜찮았다. 첫 직장과 통근 시간은 비슷했다. 그런데 이번엔 회사가 아니라 내가 이사를 했다. 인천에서 하남으로 이사를 하고 나니 상암까지 접근성이 너무 떨어졌다. 맘먹고 하라면 하겠는데 여기도 그만 둘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라 미련이 없었다. 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것도 역시 그만두라는 신의 계시쯤으로 생각하며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방황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다. 빌딩 숲 속, 쏟아지는 회색빛 미로 안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렇게 미로 안을 빠져나왔는데 난 아직도 출구를 못 찾고 헤매고 있었다. 마치 아직도 처리를 못해 무수히 남아 있는 명함처럼 내 인생도 제대로 처리가 안된 것 같았다.



기념품으로 가지고 있기엔 명함이 너무 많았다. 회사에서 겪었던 수많은 감정노동과 불필요한 마찰들, 쓰지 못한 연차처럼 너무 많았다. 이걸 처리해야 내가 좀 자유로워질 것 같았다. 서랍을 열어 한 장씩만 빼고 다 버리려고 했다. 쓸모없는 명함 따위 가지고 있어 봤자 공간만 차지하고 안 좋은 기억만 떠오를 테니깐.


근데 그게 잘 안됐다. 버리려고 해도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가슴 한쪽에서 밀려오는 아련함 때문에 버리질 못했다. 마치 명함들을 다 버리면 내가 그동안 겪어온 시간들이 쓸모 없어진 명함처럼 다 쓸모 없어지는 것 같아서, 내 젊은 날의 시간들을 허투루 보낸 것처럼 느껴질까 봐 그냥 내버려두었다.

적어도 너만은 내가 얼마나 쓸모가 있었는지, 어떻게 일 했는지, 얼마나 치열했는지 기억해 주길 바랬다.


생각해보면 아마도 난 아직도 명함 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처치 곤란한 명함 때문에 내 인생도 아직 처치 곤란한 일쯤으로 생각해 버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처음 내 이름과 직급이 새겨진 명함을 받을 때의 그 설레고 뿌듯한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다 우려낸 티백처럼 향과 생기를 잃었다.

그래, 사실 명함은 죄가 없다. 오히려 너만은 내가 지나온 길을 기억해주고 있으니깐. 미처 다 주지 못해 남은 수많은 명함들도 그냥 그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니깐.


그러니 더 이상 명함 탓은 그만해야겠다. 사실 명함이 엄청나게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명함 탓을 하는 것도 새삼 웃기다. 그냥 하나의 기념품처럼 좋았던 것도 나빴던 것도 다 추억이고 경험인 것처럼 이대로 남겨도 좋을 법하다. 

처치 곤란한 명함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의미 있는 명함처럼 내 삶도 어쩌면 처치 곤란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 내 존재 자체가 명함이 될 수도 있고, 어차피 내 인생은 그렇게 또 다른 명함을 만드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니깐. 


그래, 너는 그렇게 의미 있게 종이에 새겨져서 네 할 일을 묵묵히 하렴. 나는 나대로 또 의미 있는 일들을 찾아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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