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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트루 Jul 31. 2019

아빠의 주사는 딸 흉보기입니다

흉보기라고 쓰고 딸자랑이라고 읽습니다

이건 '옛날 옛적에'라고 시작하는 동화가 아니다. 지극히 사적인 나의 이야기이다. 아빠는 술을 마시면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신기한 재주가 있다. 그 이야기를 언제, 어디서 시작할지는 모른다. 아주 갑자기, 뜬금없이 꺼내는 경우가 많다. 아니나 다를까 빤히 내 얼굴을 보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말한다.


"저 흉터 보이지. 어떻게 생긴 줄 아나, 이서방?"

오늘의 이야기는 흉터로 시작한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덤벙거렸던 나는 곧잘 넘어지곤 했다. 기억은 안 나지만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면 그날의 기억을 말해주듯이 상처와 흉터가 숨어있다. 근데 왼쪽 눈가에 있는 흉터는 화장으로 가리고 숨겨봐도 존재감이 어마 무시하다.


"쟤가 어찌나 잘 뛰어다니고 엄청 덤벙거리던지, 그날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진 거야."

그랬다. 이 흉터는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져서 생겼다고 한다. 물론 남편을 포함해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얼른 애를 데리고 병원을 가서 꿰매었지?"

그렇지. 찢어졌으니 꿰매어야지.


"그러고 집에 데리고 왔는데 아니, 글쎄 집에 온 지 5분도 안되어서 똑같은 계단에서 또 굴러서 또 찢어진 거야."

그렇군. 또 굴러서 또 찢어졌군. 그래서 흉터가 오래가는구나. 그것도 이미 모두 다 알고 있지만.


“얘가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뛰는 걸 좋아해서 그런가. 인천 대표로 육상선수도 했었어."

어라, 대화 주제가 순식간에 바뀐다. 아주 자연스러운 연결에 아빠 말을 듣는 그 어느 누구도 감히 끼어들지를 못한다.


"얘가 계주 마지막 선수로 달리면 앞에 있던 애들도 다 따라잡고 결국 1등 하고 그랬어."

2부가 시작되었다. 이번 이야기 주제는 육상선수 시절이다. 물론 이것도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이다.



가만 듣고 보면 딸 흉을 보는 것 같은데 묘하게 딸 자랑을 한다. 그렇게 아빠는 '사랑해'라는 말을 그렇게 돌고 돌려서 한다. '네가 참 자랑스럽다'라는 말을 다양한 방법으로 이야기한다. 그렇게 결말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들은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가 않다. 그때를 떠올리며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아빠는 오늘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저번에 했던 이야기를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이어간다.


부모가 늙으면 입맛이 없어지고 대신 자식과 함께했던 추억을 먹고 산다는데 그게 맞나 보다. 이럴 거면 같이 뭐 좀 많이 해둘걸 후회가 든다. 함께 했던 추억이 많아야 평생을 배부르게 사실 텐데.


그렇게 아빠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는 나이만 먹었지 아직까지 물가에 내놓은 아이인가 보다. 그에게 나의 어설픔은 마치 아기가 첫걸음마를 떼듯 조심스러운 발걸음이며, 나의 어리숙함은 아이가 첫 덧셈과 뺄셈을 할 때 자그마한 손가락을 펼치는 것과 같다.



아빠는 그렇게 술만 마시면 어김없이 말한다. 술의 힘을 빌려 '사랑해'라는 말을 그렇게 돌고 돌아한다. '너를 아낀다'라는 말을 그렇게 계속 반복한다. 결말도 다 알고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 아빠의 이야기는 이제 흘러 흘러 우리 가족을 넘어 남편에게로, 시댁에게로 그리고 훗날 태어날 우리 아이에게까지 널리 퍼지겠다. 이러다 동네 사람들이 다 알게 되는 건 아닌지 괜한 걱정이다.


"어, 그 어렸을 때 계단에서 굴러서 눈가에 흉터 난 그 여자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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