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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Jan 06. 2021

동경

힘이 빠질 때,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댄스 스튜디오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하는 난관이 하나 있다. 바로 퇴근길 2호선이다. 오후 5시 30분, 열차 속에서 나는 차곡차곡 구겨지고 세탁기 안의 빨래처럼 이리저리 치이고 털린다. 공간이란 얼마나 유연한가. 누르면 눌러질 수 있고, 레고 블록처럼 빈틈없이 메워질 수 있는 것이다. 2호선 열차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얄팍한 외투 자락을 경계로 사람들과 몸을 맞대면서 옆 사람이 구독하는 유투브를 흘낏댄다. 물론 나의 의지나 취향은 반영되지 않는다.


열차가 사당역에서 한 차례 사람들을 한껏 토해낸다, 나는 구겨진 점퍼의 모자를 펴고, 스크롤을 내리며 블로그의 지난 일기들을 다시 읽는다. 내 마음은 왜 이리 어지럽고 혼란스러운지. 과거의 나에게 답을 구하고 싶어서 괜히 옛날 글들을 훑는다. ‘너 옛날에도 이렇게 개복치였니? 어떻게 버텨냈니?’ 묻고 싶어서. 그래도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으면, 명상 앱을 틀고 성우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작게 심호흡을 시작한다.


춤은 에너지를 많이 쓰는 일이다. 특히 스트릿 댄스는 주로 빠르고 격한 음악에 춤추기 때문에, 동적이고 안무도 화려하다. 내 몸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나는 아이돌 못지않은 댄서지만, 실제로는 주위 사람들의 0.7배속에 재생되고 있다. 느린 몸으로 안무를 따라가기 바빠 발목을 삐끗하기도 하고, 턴을 하다 엉덩방아를 찧기도 한다. 음악 속에서 나를 맡기고 몸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아직은 새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다. 배꼽이 보이는 크롭티를 입고 긴 부츠를 신은 길쭉한 여자들에게 시선을 뺏긴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 160이 되지 않는 아담한 저 사람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2호선에서 나는 기대치를 내려놓는다. 어깨에 힘을 풀고 잘하고 싶다는 굴뚝같은 마음을 털어버린다. 그냥 하자, 후우 하고 숨을 뱉고 1번 출구로 나가는 계단을 성큼성큼 오른다.




오늘은 새로운 실마리를 찾았다.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 줄 힘. 동경하는 마음.

턴을 연습하는 날이다. 한쪽 벽에서 반대 편까지. 네 명이서 일렬로 서서 오른쪽으로 턴을 돌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오른쪽 발 끝을 앞에 두고, 항아리를 크게 안 듯 양팔을 둥글게 뻗는다. 오른쪽으로 빙글, 빙그르르.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요! 그렇지! 한 점만 보고!’

J 선생님의 목소리가 연습실을 울리고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들고 계속 돌았다. 턴을 할 때는 점 하나를 찍어야 한다. 한 바퀴 돌면서 그 점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재빨리 돌아서 그 점을 다시 찾아야 한다. J의 얼굴이 점점 커졌다. ‘여긴 어디지? 나는 누구?’라는 생각이 들 때쯤, 선생님이 따뜻한 손으로 내 팔을 탁 잡았다. ‘잘했어요!’ 그 순간, 뛸 뜻이 행복했다. 어렸을 때, 내가 처음 걷기를 시작할 때, 엄마가 아장아장 걷는 나를 꽉 안아주었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턴이라는 작은 걸음마에 잘했다는 한 단어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한국에 오기 참 잘했다고. 오늘 하루는 버틸만한 가치가 있는 거였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은 나와 가까이 일하는 리더 중 한 명인 R과 면담을 했다. 그는 이성적이고 날카로워서 항상 긴장하게 된다. ‘저는 한국에 와서 훨씬 잘 지내고 있으며, 재택을 해도 업무에는 사실상 아무 지장이 없고, 팀에 기여할 수 있는 이러이러한 일들을 하고 있어요. 하하’ 긴장해서 말이 많아지고, 빨라졌다.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데 등이 땀으로 축축해졌고, 어깨가 굳기 시작했다. 핀트가 엇나가는 그의 질문과, 지금 팀이 돌아가는 상황을 잘 숙지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다. 대화에 공백이 생기는 게 쫄려서 무슨 말이라도 던졌다. ‘뭐라고?’ 하고 내 질문을 이해 못할 때는 도망치고 싶었다. 정말 들어가기 싫어서 초콜릿 쿠키를 다섯 개나 먹고 접속한 온라인 미팅이었다. 역시나, 마음이 착잡해졌다.


미팅이 끝나고 거실로 나와 냉장고를 열었다. 아보카도를 으깨고 레몬즙을 짜고 후추를 톡톡 뿌렸다. 과카몰리 완성! 크래커에 과카몰리 소스를 듬뿍 찍어먹고 초콜릿도 먹었다. 그렇게 달고 부드러운 맛으로는 채워도 채워지지 않았던 마음이,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2호선 열차를 타면서 달라졌음을 느꼈다. 꽉 채워져서 넘칠 듯이 찰랑거렸다. 맛있는 음식이 할 수 없는 일을 춤은 할 수 있는 거다. 오른쪽 발목이 뻐근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날 때 몸이 무거울테다. 그럼에도 마음은 너무 행복하니까 괜찮아.     




낯선 근육들, 몸의 왼쪽과 오른쪽을 고루 풀어주고. 발끝을 들고 스텝을 밟고. 원을 그려 점을 찍고 빙글빙글 도는 1시간 반. 내 몸에 있던 모든 근육을 하나하나 매만지고 인사한 기분이다. 집으로 가는 열차에서 오늘 배운 안무 영상을 틀어본다. 스크린 속 나는 삐걱대고, 여전히 안무를 다 못 외워서 옆 사람을 흘깃대고 반 박자씩 놓치고 있다. 그럼에도 학원 문을 나서면서 마음이 차오른다. 제일 잘해서 눈에 띄고, 완벽히 동작을 수행하는 내가 아니어도 괜찮은 것이다. 지금 내가 춤을 출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소중하고 감사할 뿐


하루에 힘이 빠지는 시간들은 아주 많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미팅이 그렇다. 퇴근 후,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춤을 하더라도 잘하기까지의 지난한 시간, 안전지대를 수없이 넘어야 하는 순간들은 나를 지치게 한다.  그럴 때 존경하는 사람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 엄청난 힘을 준다. 열정이라는 풍선에 구멍이 생기고, 그 틈새로 공기가 새어나가 쪼그라든다. 애달았던 처음 같지 않다. 그럴 때 내가 닮고 싶은 사람, 존경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부푼다. 조금이라도 닮고 싶어서 한 발짝 내딛게 된다.


J 선생님은 이제 왼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에 있다. 지난 1년 동안 싱가포르의 방에서 혼자 보고 또 보았던 유투브 앱 속 영상 속이 아니라, 내 옆에서 음악을 틀고 있다. 그림자처럼 그녀의 스트레칭을 따라 하고 있으면, 지금 꿈을 꾸는 것 같다. 춤의 기본기인 스텝과 턴을 함께 하면서, 걸음마부터 차곡차곡 쌓아가는 기분이다. 저 사람이 하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귀해서 다 기억하고 싶고, 녹음하고 싶을 만큼. 이 시간은 귀하다. 오늘 하루를 잘 살고 싶고, 다시 운동화 끈을 묶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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