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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시 Apr 03. 2023

소회



한 곳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다. 다시는 어딘가에 오래 머물지 않겠다고, 역마살 낀 사람처럼 모두의 기억에 남기 전에 사라지길 바랐다. 연기처럼 살아가고 싶었다. 어딘가에 금방 스며들었다가도, 형체 없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었으니까. 따스한 볕 아래에서도 다정한 말을 건네는 사람들 속에서도 두 눈을 감고 지나갈 날짜들만 세곤 했다.


"그래서 어디로 가려고?"


긴 침묵을 깨고 짙은 우울이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리 사람들은 따스함에 집착할까요? 그것의 빈자리가 어떻게 당신을 미치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나에게 따스함은 그저 다가올 겨울에 대한 두려움만 크게 만들 뿐인데. 그날 결국 식어버린 커피처럼 사랑이 떠났음을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미약한 온기를 내어주는 것도, 또 다른 사람의 온기가 나의 결핍을 채우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어요.  나는 퍽 어렸고 그것이 그에게 모질게 대한 유일한 핑계였다. 결국 채 반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 사람의 곁을 떠났다. 그래도 남아 달라는 말에 조금 더 머물렀어요. 덕분에 행복했어요. 진심이에요.


참 못나게 태어났다. 얼룩진 사랑으로 아파했던 기억에 죄 없는 새로운 인연을 괴롭혔다. 괜스레 가장 아픈 상처와 닮았기에. 사실 그리움에 누군가를 찾은 건 나일지 모르는 일인데도. 울적해질 때 즈음에야 다음번 만나는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잘해주어야지라는 고해성사를 했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한다 말하기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사랑한다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이 혹은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듣는 것이 두렵다.


'사랑한다 말했던 그 순간만 없었다면, 우리 서로의 곁에 평생 머무를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바보 같은 후회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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