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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Oct 26. 2021

아무래도 나는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

2021. 10. 26

  아무래도  무너지고 있는  같아.  간단명료한 문장 하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던 날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잘도 해내던 날들, 손끝과 아랫입술에 힘을  주고 고생스럽게 살아내던 날들을 어찌어찌 지나 보낸 지금, 나는 문득 이렇게 생각해 버리고  거야. 이건 필시 무너지고 있는 거라고. 그러지 않고서야  무수한 슬픔을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런데 참 이상하지. 지나갈 거라 믿으며 그 수많은 시간을 꾹꾹 참아왔는데, 인고의 시간 끄트머리에 살고 있는 것이 고작 나의 무너짐을 인정하게 되는 절망적인 순간이라니. 그러니 어떻게 내가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이내 곧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지 않을 수 있겠어. 그러니까 나는 이 모든 사실이 너무나도 억울한 거야. 버티고, 웃고, 달래기를 반복하다 보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으니까. 나도 힘껏 밝은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


  두려움이라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무너지고 있다는 게 이토록 외롭고 눈물 나는 일이었구나. 이 문장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서 하루에도 열댓 번은 혼잣말로 내뱉는 것 같아. 그러고는 또 아무 일 없다는 듯 내게 주어진 하루를 착실하게 살아가는 거지. 그러는 동안 눅눅한 속은 숱하게 휘청이고 있을 텐데 말이야. 이 사달이 났음에도 여전히 나는 내가 안중에도 없는 건가 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커다란 슬픔 중 두어 조각 정도는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었거든. 나랑 꽤 비슷하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어. 왜 그런 거 있잖아.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심지어는 성별까지도 다르면서 같은 주파수에 마음을 올려두고 있는 것 같은 사람.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 말이야. 지금껏 어떤 삶을, 얼마나 고된 시간을 버텨왔는지 뻔히 예상이 되더라고. 그러니까 그 사람의 일생이 별로 알고 싶지 않다기보다는, 너무 궁금해서 되려 속으로 삼키게 되는 거. 배려해주고 싶고, 힘이 되어주고 싶은 거. 나 쓸 힘도 하나 없는데, 바닥까지 싹싹 긁어모아서 위로의 형태로 건네주고 싶은 거.


  그런데 그 사람 기척도 없이 사라졌어. 잠깐 다녀간 사람을 무슨 수로 탓하겠느냐만, 그래도 너무 속상한 거 있지. 사랑도 뭣도 아니었는데, 그저 각자의 슬픔 몇 조각 나누곤 했던 낯선 사람일 뿐이었는데 종일을 울게 되는 거 있지. 갈증이 심하게 날 정도로 펑펑. 정이 꽤 많이 들었던 모양이야.  


  휑한 마음을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자니 꼭 폐허 같더라.

  응, 더는 사람이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회청색 폐허.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내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인지하기 시작한 게. 아주 위태롭게 흔들리는 삶을 그 사람이 알게 모르게 지탱해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 나도 참 쓸데없는 곳에 많은 마음을 맡기면서 산다 싶었지.


  하지만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았던 걸 이제 와 어쩌겠어.


  이것 참 그 사람을 미워해야 하는 건지, 죽도록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어차피 무너져버릴 마음을 찰나라도 감싸줬던 건지, 진즉 알아차리고 대비했어야만 하는 이 무너짐의 전조를 전부 가려버렸던 건지 쉽게 판단할 수 없으니까.


  이 와중에도 주변이 온통 나만큼이나 짙은 그늘이었던, 나눴던 대화의 마지막 말이 실은 많이 힘들다는 여린 말이었던 그 사람 걱정으로 뒤덮이는 꼴이 참 우스워.


  이럴 줄 알았으면 당신은 그 누구보다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라고, 그러니 꼭 죽지 말고 마음껏 살아내라고, 이 가혹하고도 멀고 험난한 길 위에서 악착같이 견뎌내라고,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싶은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줄 걸 그랬어. 덧붙여 무슨 일이 있어도 편이 되어줄 테니 당신도 날 싫어하지는 말아 달라고 농담처럼 말해볼 걸 그랬어.  



                                                *



  근래에 건강이 나빠져 찾은 병원에서 당분간은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한다더라고. 당분간이라면 언제부터 다시 술과 담배를 해도 되는 건지 되물으려다, 자칫 멍청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관뒀어. 그러고는 어제 정말 오래간만에 술을 마셨거든. 평소보다 그리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전부 게워내느라 엄청나게 고생했지 뭐야. 아직은 그 당분간이 다 지나지 않은 모양이지.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일부러 사람들이 붐비는 곳으로 걸었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슬픈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퍽 궁금했거든. 그렇게 하면 꼭 내 무너짐의 속도를 조금은 늦출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역시나 모두가 나와 그리 다를 것 없는 얼굴을 하고 있더라고. 일상생활, 가족, 사랑 및 모든 관계에서의 투쟁에 잔뜩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어.


  그들 모두가 꽤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아. 괜찮은 어른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지. 그 사람들도 마주 보며 걸어오는 내 얼굴을 보고 같은 생각을 했을까.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구나, 하면서 잠시나마 안도했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 참 대단하다. 그리고 기특하다. 용케도 잘 버텨내고 있구나’하고 작게 응원해줬을까.


  아무튼 나는 오늘 무너지고 있는 나를 봤어. 이맘때쯤이면 의젓한 어른이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어른은 온데간데없고 웬 나이 먹은 어린아이 하나가 여기에 있어. 비루한 삶 위에 놓여 꺼이꺼이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고, 한없이 무겁지만 그럼에도 따뜻한 이 마음이 한 움큼씩 무너지고 있어.


  다음에 또 편지할게.

  그러니 혼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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