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부터 2015.12.17
Day 1.5
짐 가방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에겐 인터넷이 되는 스마트폰이 있었다.
숙소로 잘 찾아가고 있었지만 불안과 불신은 여전했다.
퀴퀴하고 어두운 지하철역,
EXIT가 아닌 Way Out에 괜히 의심하고,
미로 같은 밤의 벽돌 골목 등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고 낯설었다.
당연했던 편의점도 없었다.
집을 나온 지 하루가 다 되었고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엄마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친구들에게 나의 처지를 알렸지만 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짐을 잃어버렸으니 지갑까지 잃어버리면 시트콤이라고 카톡으로 친구와 장난처럼 얘기했다.
Day 2
길을 나섰다.
밤과 아침은 정 반대다.
어제의 모든 것이 새롭게,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꼿꼿한 빨간 벽돌 건물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강한 자존심으로 느껴졌다.
어긋난 첫 단추가 아쉬웠기 때문인지
난 강박적으로 감상을 끌어내려 노력했다.
많이 걸었다.
사고 싶은 것을 조금 샀다.
잠옷을 살까 하다 잃어버린 캐리어가 숙소에 왔을까 봐 사지 않았다.
환율 계산하느라 머리가 아팠다.
나를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데도 나는 피곤한 것을 내게 숨겼다.
나를 둘러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즐겁다
사람들은 즐겁다
루시드폴-사람들은 즐겁다
템스강을 걸었다.
사진보다 더 멋졌다.
다시 한번 감상을 끄집어내려고 했으나
예매해둔 뮤지컬 시간에 늦지 않을지, 잘 찾아갈 수 있을지, 저녁은 먹어야 할지 신경 쓰이는 것들이 맴돌았다.
비가 오기 시작했고 많이 쌀쌀했다.
내일 템스강에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Day 2.5
극장에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
내 자리는 무대가 잘 안보이는 소외된 곳이였다.
비를 좀 맞아서 피곤하기도 하고, 혼자 뻘줌하게 앉아있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등 뒤에서 누가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한국으로 떠나서 처음으로 나란 존재가 누군가에게 발견되었다.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내일 저녁을 약속했다.
Day 2.9
유럽에서 데이터를 제한없이 쓸 수 있는 쓰리심이라는 7일짜리 유심칩을 샀다.
구입 후 한시간 후 정도 부터 이용할 수 있다고 했는데 몇시간이 지나도 도통 연결이 되지 않았다.
공연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구글맵으로 볼 수 없었다.
꽤 늦은 시간이었고 초조했다.
극장에서 지하철을 타고 킹스크로스역에 내려 숙소로 걸어 돌아가야 했다.
이때까지 킹스크로스역에서는 숙소로 돌아가본 적이 없었다.
지하절 역에 붙어있던 지도를 보고 숙소 위치를 대강 확인하고 길을 나섰다.
인적이 너무 드물고 어두워 모든 방향감각과 시력이 상실됐다.
공항에서 가방 없이 빈 손으로 숙소로 갔을 때보다 너무 무서웠다.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들이 상상이 되었다.
결국 이 방법으로는 숙소로 찾아갈 수 없어 다시 지하철을 타고 그나마 익숙한 러셀스퀘어역에 내려 숙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