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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Aug 10. 2022

오후 세 시

지긋지긋함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계절은 여름,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주위를 에워싼 환경이 점점 나를 옥죄어왔다. 숨을 내뱉을 공간조차 없는 것 같았다.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들이 절대적인 기준에서 힘든 것이든 아니든 간에 이제는 모든 게 다 지긋지긋했다. 생활수준이나 인간관계가 썩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 지긋지긋함에 특별한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칠흑같이 어두운 우울함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아니, 가라앉고 싶었다.


결국 어느 날, 나는 떠나기로 작정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려야 숨을 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떠나기로 마음먹은 후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나를 귀찮게 만들었다. 어디로 떠날 것인지, 경비는 얼마나 들 것인지, 누구랑 갈 것인지, 어떻게 갈 것인지. 결국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또다시 질려버렸다. 세상은 온통 복잡한 일 투성이군, 하고 푸념을 내뱉었다. 사실 난 그다지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있자니 스스로, 혹은 타인들에게 ‘완벽주의자’라고 불리는 어떤 이들은 대체 얼마나 피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득 알지도 못하는 그들이 측은해졌다.


정확히 하루 반나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 같은 마음으로 방안에 누워버린 채 의미 없는 천장 무늬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문자메시지와 전화가 휴대폰을 울게 만들었지만, 배터리가 모두 소모되자 아무것도 나를 방해하지 않게 되었다. 그야말로 정적이 나를 찾아왔다. 이렇게 죽으면 아무도 모르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가 누워있는 이 집은 대학가 원룸 중에서도 값이 싼, 그러니까 학교에서 가깝진 않지만 그다지 멀지도 않은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옆방에 누가 사는지, 혹은 누가 새로 이사를 오거나 떠나갔는지에 대한 사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간혹 노인들이 아무도 모르게 죽은 채 몇 달씩 방치되어 있다가 시체 썩는 냄새를 맡은 이웃들에게 발견되는 일이 아주 먼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가끔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는 것 외에는 무언가를 먹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귀찮게 느껴지면 그런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에게도 밤은 찾아왔다.


낮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어서일까, 모두가 잠이 들었을 법한 시간에도 나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머리맡에서 진동소리가 들렸다. 불빛 하나 없던 천장에 스산한 푸른빛이 비쳤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보았다. 빛을 발하는 휴대폰 액정에는 발신번호가 없는 메시지 내용이 자동으로 표시되어있었다.


‘미로동 34번지 파란 대문. 오후 세 시, 당신을 초대합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로 동이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이름이다. 누가 이 시간에 발신번호도 없이 문자메시지를 보낸 걸까. 나는 무심코 회신을 할 수 있는 OK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휴대폰의 액정에 불빛이 사라졌다. 배터리가 나간 것이다. 나는 재빨리 콘센트에 꽂혀있던 충전기를 휴대폰에 꽂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이유 없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휴대폰을 켜고 문자메시지함을 열었을 때, 나는 허리께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확인했던 그 메시지가 사라진 것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방의 불을 켰다. 오한이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거울을 보니 초췌한 내 얼굴이 보였다. 


단순한 불면증이 아니었다. 기묘한 문자메시지를 받은 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사실 단순한 장난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무시해버리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살아있다는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느껴지는 듯한 생생한 공포를 느낀 것이다. 오래전부터 방안에 굴러다니던 컵라면으로 아침 겸 점심 때우고 오랫동안 샤워를 했다. 머리를 물기 하나 없이 말린 다음 흰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다. 아직 오전 11시 반이었다. 얼마간의 여유는 남아있었다. 


인터넷으로 미로동 34번지를 검색했다. 미로동(美路洞)은 내가 다니는 A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는 기학산(奇壑山) 자락 동쪽에 위치한 오래된 동네로, 번화한 서쪽의 길원동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길이라는 의미의 미로 동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잡하게 얽힌 ‘미로’라는 의미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마치 그것을 증명하듯 미로동에는 복잡한 골목이 많았다. 나 역시도 내가 사는 2층짜리 원룸주택과 학교를 오가는 길 말고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지도를 검색하던 나는 이상한 일을 발견했다. 33번지와 35번지는 찾을 수 있었지만 34번지는 어느 곳에도 표시되어있지 않았다. 오자마자 사라져 버렸던 문자메시지처럼 지도상의 위치도 기묘했던 것이다. 나는 33번지와 35번지 사이를 어림짐작 해보았다. 데이터베이스에만 누락되어있는 것이라면 이쯤에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짚어 보았다. 결국 직접 눈으로 보며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겠군, 하고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일단 33번지를 찾아가야 했다.


이틀 만에 직접 닿는 햇살은 따가웠다. 하지만 몸에는 아직도 한기가 남아있었다. 그 흔한 귀신 이야기조차 절대 믿지 않던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생각했던 대로 34번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굽이진 골목을 돌다 보면 금세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번지를 나타내는 푸른색 표지판은 일정한 법칙 없이 마구잡이로 붙어있었다. 결국 2시 40분이 다되어 33번지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봐도 34번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마에 흐르던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 티셔츠에 문질렀다. 겨드랑이도 축축하게 젖어 옷 색깔이 짙어졌다. 바람이 약간 불자 땀에 젖은 옷이 차가워지며 찝찝한 시원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몸이 약간 지치자 어젯밤부터 몸을 죄는 듯했던 긴장은 어느 정도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제는 알 수 없는 오싹함이나 공포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이 앞서게 되었다. 나는 일단 잠시 쉬기로 하고 우선 33번지의 건물을 살펴보기로 했다. 언뜻 보기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주택이었다. 약 30평 정도 되어 보이는 2층 양옥이었는데, 을씨년스럽게 색이 바래 있었다. 건물은 붉은색이었고 현관 기둥과 옥상에 둘러있는 난간이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내 어깨와 비슷한 높이의 회색 담장의 위쪽엔 깨진 유리병 조각이 불규칙하게 박혀 있었다. 깨어진 조각에 인쇄된 하얀색 글씨는 지금은 판매하고 있지 않은 꽤나 오래된 음료수의 상표였다. 담장의 벽면에는 거칠거칠한 시멘트 덩이가 붙어있었다. 


나는 33번지의 담장 앞에 서서 집 안 쪽을 쳐다보았다. 마당이랄 것도 없는 좁은 면적에는 자라다만 잔디가 듬성듬성했고 반지하로 보이는 지하실 창문은 셋 중 두 개가 깨져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지하실로 들어가는 어두운 철문이 있었다.


‘34번지’


나는 눈을 비볐다. 잘못 본건가? 아니다. 어두운 철문에는 분명 34번지라고 쓰여있었다. 그때, 갑자기 33번지 양옥 건물의 현관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동시에 34번지라고 쓰여있던 어두운 철문도 철컥,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회전했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누군가 내가 여기에 서 있는 것을 알고, 나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쪽에서 문고리를 돌고 내가 들어올 수 있게 문을 연 것이다.


나는 두려움과 호기심을 반쯤 씩 손에 나눠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34번지 철문의 문고리는 차디찼다. 순간 한낮의 모든 열기를 삼켜버리는 듯한 오싹한 냉기가 온몸에 퍼졌다.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문을 잡아당기자 어스름한 빛으로 계단이 보였다. 꿀꺽, 하고 침을 한 번 삼킨 나는 무슨 용기에서였는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 지긋지긋함 보다야 이런 스릴이 훨씬... 으억!


내 생각의 문장은 끝을 맺지 못했다. 34번지의 철문은 엄청난 힘과 함께 쾅하고 닫혔고 그 충격으로 나는 어두운 계단 밑을 향해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철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그리고 철문에 쓰여있는 숫자는 35로 바뀌었다. 철문은, 아니 35번지는 지긋지긋한 인생이 또 어디 있나 하고 다시 탐색하기 시작한다.




image source: https://unsplash.com/photos/tajh_UdgI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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