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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Aug 31. 2022

이직의 유효기간

모든 것에는 끝이 있으니까요

이 글의 작성된 시점은 2021년입니다.


1년 전 일이다.

나는 맞은 편에 앉아있는 A책임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봤다. 회사를 나보다 10년 정도 더 오래 다닌 A책임님이다. 그는 얼굴을 노트북에 파묻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인데 노트북을 연 것을 보니 바쁜 일이 많은 듯 했다. A책임님은 아마 시작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교육 과정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교육 과정 준비는 크고 작은 할 일이 참 많다. 교육을 기획 해야 하고, 참가 안내를 해야 하고, 강사를 찾고 선정해서 이런 저런 상의를 하며 컨텐츠를 만들어야 하고, 교재를 만들고 과정을 진행해야 하고, 때로는 직접 강의를 해야 하고, 끝나면 보고서도 만들어야 한다.


나는 10년 뒤 내 모습을 떠올려봤다.

여전히 나는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A책임님처럼 엑셀 시트의 열과 행을 이리 뜯고 저리 붙이며 어떤 모양이 더 좋을지 고민하며 키보드를 두드릴 것이다. 큰 변화는 생각해보기 어렵다. 50 여 명 정도가 모두 교육을 담당하는 전문 조직이기에 회사를 떠나는 길 말고는 업무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다.


1년 전의 몇 주 전, 같은 그룹 B회사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말하자면 계열사 이동이다. 그 회사의 누군가 나를 좋게 평가한 모양이었다. 용기를 냈다. 팀장께 예의를 갖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히 인사팀까지 전달이 되었지만 결국 허락을 받지 못했다. 주워 담지 못할 이야기였기에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사실 지금 회사에 올 때 역시 계열사 이동을 한 것이었다. 그때도 쉽지 않았다. 나를 데려오려고 그룹 내 이동이니 긍정적인 관점에서 봐 달라는 말로 설득했다고 한다. 나는 이번에도 그렇게 생각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내가 건너 들었던 말은 '키워줬더니 배은망덕하게 어딜 가려고 하냐'였다. 인사팀의 강경한 태도 때문에 B회사에서는 제안을 접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변화 없는 삶을 견딜 수가 없다.

누군가는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편안함과 안정을 느낄 터였다. 그러나 나는 반대다. 일상이 반복되면 덜컥하고 겁이 난다. 이 성격은 어디에서 온걸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무엇이든 끝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인정한 뒤부터 이러한 태도가 생긴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사람과의 관계든, 다른 사람의 생이든, 나의 생이든, 심지어 이 우주도 끝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시리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아득한 공간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유영하는 듯 외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새로운 경험과 변화를 추구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다. 


그게 내가 나의 삶을 존중하는 방식이며
'끝'이라는 필연이자 절망에 대처하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직을 했고, 한 달 반 뒤, 다시 한 번 이직을 했다. 그리고 4개월이 흘렀다. 내 이직에 대해 여러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나 역시 누구에게나 편히 이야기 할 수 있을 법한 일반적인 이유를 몇 가지 만들어냈고, 듣는 대상에 따라 적절한 것을 선택해서 설명했다. 이직을 하는 이유를 말할 때 '생에는 끝이 있으니까요.' 라고 말하는 것은 솔직하나 적절하진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직한 회사는 어떠냐는 질문에 나는 같은 대답을 한다. '만족한다.'는 나의 대답에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는다. 10년 넘게 일을 했지만 새로운 곳에서는 모든 게 새롭다. 이것이 이직의 즐거움이다. 오늘의 나는 즐겁다. 언젠가는 죽게 될 나지만 지금은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낀다.


유효기간이 끝나서 다시 또 덜컥, 하고 가슴이 내려 앉는 날이 왔을 때, 지금의 자리에서 선택 가능한 변화가 없을 때, 나는 다시 이직을 꿈꾸게 될 것이다.




image source: https://unsplash.com/photos/7_hT9sWP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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