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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Aug 25. 2018

퀄 시험 결과 발표

퀄 시험은 끝났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카를로스 교수님이 일부러 학생들에게 점수를 주려고 냈던 문제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으니,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밤에 자려고 누워도 오로지 이 생각만 났다.


하루는 모래 놀이를 하는 토쥬군을 지켜보며 벤치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또 그때의 실수가 떠올랐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 스스로가 너무 싫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실수였다. 날이 갈수록 나는 점점 더 깊은 자책과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퀄 시험 일주일 뒤,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신은 이미 다른 데 가있었다. 겨울에 카를로스 교수님이 출제한 퀄 시험 문제를 다시 한번 볼 생각을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험 결과 발표일이 가까워 올수록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나도 모르게 신경도 날카로워져서 아주 사소한 것으로 아내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리던 어느 날, 박사 과정 코디네이터인 패트리샤에게서 단체 메일이 한통 도착했다. 내용인즉슨, 원래 퀄 시험 결과를 오늘 발표하려고 했는데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서 내일 오전에 메일로 결과를 보내준다는 것이다. 그 메일을 받고 동기들이 전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공지 없이 그냥 내일 결과를 발표했어도 됐을 텐데... 다들 더 불안해지기만 했다. 오늘 밤에 잠은 다 잤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어쨌든 내일 오전이면 결과가 나오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강의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는데 우연히 대학원 디렉터 교수님과 마주치게 되었다. 평소 같으면 "How are you?"라고 인사를 했을 교수님이, 오늘은 웬일인지 나를 보더니 "Is everything okay?(?)"라고 물어보는  아닌가.


왜 평소랑 다르게 인사를 하는 거지? 순간, 뭔가 잘못된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 패트리샤가 시험 결과를 발표했을 테고,  교수님은 대학원 디렉터이니 이미 결과를 알고 있을  분명했다. 그러면 방금 말한 "Is everthing okay?" 나를 향한 위로의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니 더욱 우울해졌다. 그리고 그날 밤은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다음 날 아침, 이제 조금 있으면 패트리샤가 결과를 메일로 보내줄 것이다. 차마 아내에게 곧 있으면 시험 결과가 나온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혼자서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로 메일함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예정대로 패트리샤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아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떨렸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잠시 숨을 고른 뒤, 조심스레 메일을 클릭했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전과목 합격이었다. 분명히 전과목 패스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바로 거실로 뛰쳐나가 키친에 있던 아내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전과목 다 패스했어"라고 말하며 나도 모르게 엉엉 울어버렸다. 그동안 혼자서 속으로 끙끙댔던 것들이 한순간에 북받쳐 올라온 것이다.


당시 내가 받았던 퀄 시험 결과 발표 메일


만약 그때 마지막 시험에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시험이 끝난 뒤 밤마다 침대에 누워 자책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결과를 확인한 뒤 서럽게 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퀄 시험도 생각보다 별 거 아니네”라는 건방진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그 실수 하나 때문에 천국과 지옥을 여러 번 오가며 멘탈이 무너져버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삶에 더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반전 하나가 더 기다리고 있었다. 퀄 시험 결과 발표 메일을 받고 몇 시간 뒤, 패트리샤로부터 메일 하나가 더 도착했다. 메일을 클릭해보니,


토마스 축하해.
거시경제학 시험에서 네가 1등을 했어.


미국에 온 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아마 이때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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