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잠JAM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요일 Sep 23. 2023

잠(JAM)15

SF 장편소설

15.인스톨


‘정답이라…. 그럼 저 사람들까지 죽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관리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엘리가 문득 또 하나의 사건을 떠올렸다. 자신이 최초로 수면 캡슐 출산에 성공한 이룬의 아이. 그 순간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라서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 * *


90년 전, 이룬을 인스톨하기 전날, 아이를 가진 상태로 가수면에 들었던 이룬에게서 아이를 먼저 출산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였다.


- 아이요? 세상에… 왜 내 첫 인스톨 케이스가 이렇게 고난도죠?


관리자가 절망에 빠진 엘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를 받는 건 우리 직원이 할 거니까 엘리는 인스톨에 집중해줘요.

- 아니 관리자님. 저 같은 애가 무슨 애를 받아요. 그건 모르겠고 바이탈이 문제라서. 일단은 저 산모 바이탈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인스톨은 신연방 역사상 단 한 건도…


엘리가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 아니 뭐 거의, 거의 한 건도 없을 거라고요. 그렇단 이야기는 그만큼 시도가 없기도 했지만 있었다고 해도 거의 실패했을 테니 케이스에서 뺐겠죠. 저 이래 봬도 신연방 대학 수석이에요.


엘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인스톨이라는 작업이 그만큼 정교하고 어려운 작업이라 수면센터 담당자인 타이머들은 엘리트 중 엘리트가 뽑혔다.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직업군이고 그만큼 대우도 최상급. 아마 엘리만 해도 큰 혜택을 받아 부유 돔에서 생활했을 것이다.


- 엘리, 부디 침착하게 그 좋은 머리를 써요. 어떡하면 산모의 바이탈에 무리 없이 인스톨을 진행할 수 있을지.

- 있었으면 벌써 써먹었죠… 아!


관리자가 엘리의 마지막 말에 집중했다.


* * *


다음 날 오후 일단의 인물들이 비행정으로 센터에 도착했다. 엘리가 이룬의 캡슐을 소환했다. 이룬의 배는 이미 출산 징후가 뚜렷하게 불러 있었다.


- 아이가 무척 클 거야.


엘리가 가만히 셈을 해가며 말했다. 보통 아기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부지런히 움직일 것을 권했다. 그건 아기를 키우기 위해 보통보다 먹는 양이 늘어나는데 대신 몸이 힘드니 움직이기를 꺼려서 아기가 과하게 성장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큰 아이는 출산 때 큰 고통을 수반하고 심지어 산모를 위태롭게 하기도 했다. 아무리 과학, 의학이 옛 지구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달했다고 해도 여전히 출산은 자연 분만을 권했다. 그건 모체에서 성장하는 동안 익히게 되는 학습이 아기의 체질을 더 강하게 해준다는 오랜 학설이 아직도 뒤집히지 않아서였다. 이룬은 아이가 자라는 동안 캡슐에서 움직이지 않고 생존을 위한 영양분을 공급받았지만, 아기에게 가는 탯줄에는 별도의 튜브를 달아 아기를 위한 영양분을 공급했었다. 당연히 아기는 정상보다 무척 성장했을 것이다.


- 하지만!


숨을 고른 엘리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 그렇다고 배에 레이저를 대는 건 바이탈을 더 흔들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다소 촉진제를 쓰더라도 자연 분만을…

- 자연 분만이요?


같이 온 무리 중 한 여자가 날카롭게 말했다. 관리자가 그를 바라보며 엘리를 가리켰다.


- 카트린, 엘리는 최고의 천재 그룹이에요. 엘리의 말을 좀 더 들어보고 판단합시다.


카트린이라고 불린 여자가 곧 고개를 숙이며 네라고 했다. 엘리가 관리자를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 아 당신이 무리의 대장이었나요.


잠시 생각을 정리한 엘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 여러분들의 어머니를 생각해봐요. 그분들이 당신들을 위해서 무엇을 희생했고 무엇을 지켜주었는지.


엘리의 말에 집중하던 사람 중 하나가 아! 하며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 소리에 사람들이 자신을 보자 머쓱했는지 흘러내린 머리를 그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고 다시 엘리를 보았다.


- 모성애는 무엇보다 큰 사랑이니까요. 엄마의 힘을 빌려보자는 거죠.

관리자가 박수를 쳤다. 그 박수에 사람들이 곧 출산 준비에 들어갔다. 혹시 몰라 촉진제를 챙겨온 사람은 그 아! 라고 한 사람이었다.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엘리의 말이 이어졌다. 어쩌면 그만큼 엘리도 불안하기에 스스로 용기를 주려고 하였는지도 몰랐다.


- 사실 출산과 인스톨은 상극인데 거기에서 실패를 예방하겠다고 시작한 팀들은 전부 실패에 성공했어요.


까지 말한 엘리가 잠시 눈을 감았다. 순간 센터 콘트롤 데크에 정적이 맴돌았다. 관리자의 지시가 내려진 후로는 그 누구도 엘리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잘 따르는 거든지, 잘 따르게 한 거든지.


몇 분 후 눈을 뜬 엘리가 다시 입을 열자 콘트롤 데크에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파도가 밀려오는 동안은 고요하게 너울만 일다가 밀려와 부딪치는 순간 모든 것이 살아나는 것처럼 엘리의 목소리가 세팅에 분주한 사람들의 움직임에 리듬을 주는 것 같았다.


아니 관리자는 오히려 놀라고 있었다. 엘리의 말이 공간을 리드미컬하게 조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순간 엘리는 신연방 최초의 출산 후 인스톨을 위한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된 듯했다. 옛 지구 성애자인 관리자에게 무엇보다 아쉬웠던 게 바로 교향악단이 사라진 것이었다. 지구를 탈출한 인원은 극소수였고 그중 악기연주가 가능한 사람은 더 적었다. 하물며 마에스트로 급 지휘자라는 존재는 동물이 멸종하듯 멸종해버려 지구 박물관에 보관된 진공 전시관의 LP에서나 볼 수 있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 기록을 뒤져보니 모두 일곱 번 시도가 있었어요. 이들은 모두 실패한 사례를 기록에 남겼는데 이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순간 사람들이 다시 하던 일을 멈추고 엘리에게 시선을 모았다. 사실 누구에게 한 질문인지 몰라서였지만.


- 혹시 제왕…절개?


누군가의 대답이 있자 엘리가 정답!이라고 외쳤다.


- 맞아요. 일곱 차례의 제왕절개가 시행되었고 일곱 차례 산모 모두 인스톨 실패 후 출산과 인스톨의 부작용을 못 견디고 사망.


긴장감이 실내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의학계의 디렉터급 직업군이거나 센터 관련자, 캡슐 타이머 등 이 계통에서 꽤 실력을 쌓은 이들이기에 지금 하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그때,


- 심지어 아기까지 사망해서 관련자들에게 3호 달 40년 노역형이 내려졌어요. 물론 일이 년 후 거의 사면 됐지만.


이번엔 협박이다. 신연방에서 인구는 무척이나 중요한 이슈였다. 기껏 늘려놓으면 중력에 눌려 죽고 자기 폭풍에 휘말려 죽고 희한한 바이러스에 후각 기능을 상실하다가 결국 심장마비나 폐색으로 죽기도 하고 최근엔 심심찮게 하이에나까지 인구수를 줄이는 데 동참했다. 이런 시국에 산모의 죽음이야 어떻게든 커버가 되겠지만 아기의 죽음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 그래서


엘리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엘리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얼굴에 가득했던 수심이 서서히 사라지는 게 보였다.


- 아무도 실행한 적이 없는 방법, 즉 자연 분만해보자는 겁니다. 과연 가수면 상태였던 엄마가 아기를 지켜줄 것인지. 또한 산모는 자기 자신을 지킬 것인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면 이왕이면 안 갔던 길로 가봅시다.


엘리의 조금은 긴 연설이 끝나자 관리자를 시작으로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어디서 봤는지 엘리가 청중을 향해 연주를 막 끝낸 지휘자가 돌아서서 인사를 하듯 멋들어진 인사를 보냈다. 그 모습에 관리자는 또다시 놀랐다. 그리고는 엘리를 유심히 기억 안에 집어넣었다.


- 옥시토신 투여할까요?


준비를 마친 사람이 보고하고 튜브에 주사제를 투입할 준비를 했다.


- 옥시토신이요?


엘리가 되물었다.


- 자궁수축을 촉진하는 호르몬입니다. 투입할까요?


엘리가 잠시만요. 라고 대답하고 순식간에 옥시토신이라는 단어를 두뇌의 전극에 연결된 브레인 드라이브에서 찾아냈다. 사랑의 호르몬. 좋아. 옛 지구 식이네. 옥시토신에 관련된 모든 사항이 정연하게 엘리가 착용한 데이터 링크를 통해 눈앞에 띄워진 스크린으로 전송되었다.


자궁수축을 유도하여 태아를 자궁 밖으로 밀어내는 일을 돕는다. 아이에게 자신감과 사랑을 북돋아 주는 호르몬. 사회성과 신뢰감을 형성시켜 주고 모유 수유에도 도움이 된다. 안 쓸 이유가 없다. 오랜 시간 구축된 지식과 케이스를 바탕으로 한 정보가 엘리의 브레인 드라이브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이룬의 수면 캡슐에서 전송된 데이터를 가상 스크린에 띄워 바이탈을 체크했다. 바이탈은 가수면 상태로 가장 안정적인 상태였다.


- 자, 이분이 무슨 죄를 짓고 휴머노이드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역사를 시작해봅시다.


엘리가 손뼉을 짝 치며 모두에게 당찬 선언을 던졌다. 옥시토신을 들고 엘리의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이 엘리의 손짓에 따라 튜브에 호르몬 키트를 투입했다. 호르몬은 튜브에 투입되자마자 분해가 시작되며 투명한 관을 따라 이룬의 몸으로 들어갔다. 엘리가 이룬의 상태를 면밀히 체크했다. 메디컬 디렉터가 이룬 곁에서 이것저것 조언하고 출산을 도울 준비물들이 제자리에 놓였다.


- 시작이에요.


메디컬 디렉터의 말에 엘리가 이룬의 얼굴을 보았다. 이룬이 눈을 뜨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이런… 깨어났어.


엘리가 순간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관리자가 다가와 스크린을 보고 말했다.


- 인간은 참 신비한 존재야. 가수면이 어떻게 풀렸지.

- 가수면을 스스로 풀다니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죠?


수면센터 타이머였던 남자가 엘리에게 의문을 던지자 엘리가 글쎄요. 라고 말하고 브레인 드라이브를 검색했다.


- 세상에… 가수면을 스스로 푼다니… 그럼 수면센터에서 수면 중인 사람 중에도 저런 일이 있었던 적이 있을까?


기록을 찾아보던 엘리가 수면 중에 스스로 깨어난 사례가 한 번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기록은 이미 수백 년도 더 된 사건으로 수면센터 초창기의 일이고 그 일로 인해 장치와 약품이 발전을 거듭해 이후로는 단 한 건도 이런 케이스가 없었다. 현대 수면센터의 기록으로는 불가능한 케이스를 이룬이 만들어낸 것이다.


- 산모의 신체에서 자체 옥시토신 반응이 활성화됩니다.

- 태아 바이탈 모두 정상입니다.


이룬과 태아에게 연결된 스크린을 모니터링하던 조직원이 보고했다. 투입된 호르몬과 별개로 이룬에게서 확연하게 자체 호르몬 분비가 시작되었다.


- 출산할 걸 알아요.


엘리는 마치 자신을 보듯 인상을 쓰며 카메라를 보는 이룬을 보고 감정에 무엇인가 낯선 기운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이룬은 캡슐에 고정된 상태로 움직임이 제한되는 틈에서 사력을 다해 아기를 내보내고 있었다.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사력을 다해 안간힘을 쓰는 소리가 데크를 가득 메웠다.


끄으으응 으아아아악


이룬의 안간힘을 다한 비명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서 한결같은 모습은 모두가 이룬의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하나가 되어 간절한 에너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소리 없이 뜨겁고 열정적인 응원을 모아 결국 이룬은 아기를 출산하는 데 성공했다. 메디컬 디렉터가 손을 뻗어 아기를 받아냈다. 그가 이룬에게 아기를 보여주었다.


- 아들이에요. 축하해요.

- 크…지우…이지우


이룬이 중얼거리며 아기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손은 고정 장치에 묶여 닿을 수 없었다. 안간힘을 쓰며 아기를 만져보려고 하던 이룬의 손이 툭 떨어졌다.


삐이이이…


- BP가 급격히 떨어집니다!


바이탈을 체크하던 메디컬 엔지니어가 긴박하게 소리 질렀다. 엘리가 콘트롤 패널에서 긴급 리커버리 프로토콜을 불러내어 이룬에게 연결했다. 연둣빛이 이룬을 감싸며 캡슐에서 투입된 수많은 나노봇이 이룬의 신체 곳곳으로 움직였다.


- 아기도 떨어져요. 아기가!


엘리의 손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아기가 있는 소형 캡슐에서도 이룬 것처럼 연둣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노봇이 투입되고 아기의 몸에서도 리커버리를 진행했다.


- 안정됐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모니터링 하던 메디컬 엔지니어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하자 콘트롤 데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엘리에게 다가온 관리자가 수고했다며 엄지를 추어올렸다.


- 이제 인스톨해야죠.


엘리가 정해진 프로토콜대로 이룬을 인스톨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가상의 콘트롤 패널 위에서.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과 명쾌한 판단으로 진행된 엘리의 인스톨 프로세스는 주변에서 보는 이들에겐 마치 지휘를 위해 허공으로 손을 휘젓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한쪽에서 저게 처음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은 수백 번의 시뮬레이션 과정이 엘리에게조차 그 순간을 아주 익숙하게 느껴지도록 했지만.


인스톨이 완료되었습니다.


정식 수면 인스톨에 이어 휴머노이드 인스톨도 성공을 알리는 시그널이 떴다. 엘리가 이룬의 얼굴을 보았다. 모든 짐을 덜어낸 것처럼 평온한 모습이다. 관리자가 손뼉을 치며 성공을 축하했다.


- 잘했어요. 엘리, 아 참 한 사람 더 해줘야 하겠어요.

- 네?

- 아 아기… 지우를… 아니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관리자가 눈짓을 하자 메다컬 엔지니어가 뒤에서 다가와 엘리에게 마취 캡을 씌웠다. 순간 엘리의 눈이 동그랗게 바뀌었다가 고개를 푹 꺾으며 쓰러졌다. 그런 엘리를 받아든 요원이 준비된 수면 캡슐로 엘리를 옮겼다. 동시에 옆에서는 아기를 소형 수면 캡슐에 올리고 아기와 엘리의 수면 인스톨이 진행되었다. 모든 작업을 마치자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수면 캡슐로 들어갔다. 잠시 후 수면센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적막에 빠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잠(JAM)1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