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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온군 Jun 25. 2020

‘준다’는 행위에 대한 고찰

왜 나는 ‘대가 없이’ 주는 게 어려울까

먼저 ‘희생’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 어렵다. 아무리 양보해도 쉽지는 않다. 아래의 '희생'의 사전적 정의만 봐도 그렇다.


어떤 사물(事物), 사람을 위(爲)해서 자기(自己) 몸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따위를 바치거나 버림


자아과잉을 살짝 섞어서, 자신의 유일한 세계인 자기 자신을 그 어떠한 이유로 '돌보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바치고 버린단' 말인가. 그런데 인간은 때로 희생을 한다. 희안한 동물이다.

사람은 모두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있다. 타인을 위한 봉사와 희생도 어찌보면 스스로의 정신적 만족을 위한 것이라는 것. 타인을 도우면서 느끼는 자신에 대한 자기효능감이 봉사와 희생을 감내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겉으로는 대단한 행동이지만, 그 내면에는 티나게 들어나지는 않는 ‘특수한 이기심’이 깃들어 있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생은 쉽지 않다.



‘대가 없이’가 어려운 이유


봉사와 희생을 더 단순한 말로 바꾸자면 ‘대가없이 주는 것’이다. 어떤 보상적인 대가가 없어도 그저 주는 행위이다. 위에서 ‘특수한 이기심’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그리 쉬운 행동은 아니다. 아무리 자기의 자기효능감을 증진시켜주는 일이라 하더라도 용기가 수반되야 가능한 일이다. 100을 들여서 100 또는 그 이상이 나오지는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100을 들였는데 0이 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을 돕는다는 건 용기를 수반하는 일이다. 나의 행위가 그저 에너지 낭비로 끝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의 행위에 대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과연 누가 확실히 보장할 수 있겠는가. 보상을 반드시 바란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인정 또한 (크기는 다를지언정), 사람이라면 내심 바랄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가치있었다는 말 한마디라도.



‘대가’가 없어도 주는 사람들


‘대가 없이 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타인에게 ‘주는 행위’는 나의 손실 또는 고통을 수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가 없이 주는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우선 타인에게 ‘줌’으로써 스스로에게 어떠한 손실이나 고통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준다는 행위가 자신의 것을 빼앗긴다는 의미가 아닌, 오히려 자신을 채워주는 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내가 그 사람에게 10만원을 쓰면 나에게 10만원이 줄어드는 것이고, 또 나의 1시간을 그 사람에게 쓰면 나의 1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뻔한 이치인데 말이다.



어쩌면 놓치고 있는 사실


정말 그럴까? 여기에서 놓치고 있는 극명한 사실 하나가 있다. ‘준다’라는 행위가 없다면 ‘받는다’라는 행위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받는다’는 행위는 누군가의 ‘준다’라는 행위에 수반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나>의 ‘주는’ 행위는 누군가에게는 <타인>을 통해 ‘받는’ 행위다. 나 또한 타인의 ‘주는’ 행위로 인해 ‘받게’ 된다. ‘준다’의 또 다른 의미는 ‘받는다’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받는’ 행위는 ‘주는’ 행위를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받으면 무언가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반대로 말해서 많이 받기 위해서 ‘주는’ 행위를 그만큼 해야한다. 타인에게 ‘받는’ 행위의 경험을 선사하면 ‘준’ 사람은 그 사람에게 다시 받을 수 있다. 무언가 계산적으로 들리는가. 감히 말하지만, 이는 그저 인정해야할 인간 관계의 법칙이다. 계산을 하든 하지 않든 존재하는 법칙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받지 않고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추가적으로 우리는 ‘받았기 때문에 준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한다. 애인에게 애정과 선물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먼저 그에게서 받았기 때문이다. 자녀를 돌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또한 이미 먼저 받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그것의 형태는 다양하다. 기쁨, 책임감, 자존감, 흥분, 존재감 등이다. 우린 물질적인 것만 받지 않는다. 어쨋거나, 그것이 무엇이든 주려는 사람은 이미 받은 사람이다.

그렇다. ‘받은 사람’이 '주는 사람'이 된다. 이 말은 누군가에게 슬프게 들리는 말이다. 받은 게 별로 없는 사람은 희망이 없을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우린 언제나 ‘주는’ 행위를 통해 ‘받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선순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주는 것의 가치를 알고 그 힘을 믿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 강자는 '주는 사람'이다. 받은 게 없어 불평하기 전에 먼저 주고 나서 강해지면, 이미 받은 게 많아진 사람이 될 것이다. 이상한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줄 수 있는 게 많아지면 받지 않아도 이미 많이 받은 것이다.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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