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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go Jul 09. 2022

나는 잘 쉬고 있는 것일까?

나의 번아웃 이야기 

2022년 7월 9일, 오늘은 토요일이다. 

금요일 밤 동료를 만나서 가볍게 맥주 한 잔을 나누면서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도 하면서 금요일 밤을 그렇게 보냈다. 수다는 내게 있어 삶의 원동력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대화를 즐기기 시작했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의 시간, 배우는 게 많음은 물론이고 서로의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즐거움을 알기 시작했다. 


나는 수다를 떨면서 쉰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는 이 보다 더 소중한 시간은 없는 것 같다. 타인의 삶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집중해서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지만 나 또한 이런 시간을 빌어서 내 안의 찌꺼기를 쏟아 낼 수 있기 때문에 일종의 정화 작용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설'이라는 단어가 걸맞지 싶다. 부산하게 쏟아내는 그런 대화가 아니라 차분히 내 이야기, 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그렇게 살포시 드러내다 보면 어느새 복잡했던 머릿속은 가볍고 차분하게 가라앉는다는 느낌을 받고는 한다. 


나의 첫 번째 번아웃 

번아웃은 일종의 탈진 상태라고 보면 된다. 의학적 설명을 찾아서 문단을 채우고 싶지 않아서 정의를 찾아보지 않았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적어도 당신들은 번 아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의학적 정의를 다시 쓴다는 것은 사족에 불과할 뿐이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한다. 너무 바쁘게만 살다 보니까 정확한 년도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나이를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게 나의 평소 생각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동년배에 비해서 젊은 생각을 유지한 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내가 번 아웃을 처음 겪은 날의 나의 상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밤늦게 퇴근한 나는 귀가 하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다가 울음을 터트렸다. 당시는 동거인이 있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거실로 나왔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물음에 내 울음은 더 크게 터져버리고 말았다. 사람이란 게 그렇다. 누군가 위로를 해주고 공감을 해주면 더없이 서럽게 울음이 터진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나는 매우 지쳐 있었다. 울음이 터지기 전까지는 몰랐다. 당시 나는 30대 중반이었지만 퇴사를 한 시점이니까 2008년으로 기억한다. (글을 쓰다 보니까 기억이 떠올랐다) 울음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엉엉 울어 본 적은 드물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매우 놀랐다. 


방송국 PD 생활도 힘들었다. 가장 힘들었던 이유는 일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창의적인 예고편, 프로그램 제작으로 시청률 1위, 항상 상위권 결과물을 이끌어 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방송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스포츠 방송 세상에서 가장 혹독했던 것은 다름 아닌 선배의 욕설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라이브 방송이란 환경, 방송이 시작되고 끝이 날 때까지 모두들 교감신경이 극도로 예민한 상태가 되어서 인권이라는 단어 따위는 우스운 상황이 되어 버린다. 오로지 말초적인 단어, 그것은 욕으로 전환되어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고 이런 상태에서 소통이 이루어진다. 


"야이~ 새끼야. 지금 자막 넣으라고!"

스포츠 방송이란 게 겉으로 보면 참 화려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참 더럽다. 나라는 사람이 어쩌면 매너를 갖고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다 보니까 그들이 미웠는지 모른다. 아니 이해를 못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고는 한다. 하지만 언제나 내 결론은 그렇지 않다이다. 개인이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여유가 없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는 타인을 닦달하는 상황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야구 경기를 하면 끝 날 때까지 평균 3시간 45분 정도가 걸린다. 물론 연장전이라는 변수가 있기도 하지만 대대가 그렇다. 하지만 방송을 준비하는 시간을 따진다면 하루 반나절 이상 시간이 필요하다. 기술팀과 디자인팀 그리고 생방송 현장팀으로 이루어진 구조 탓에 '마스터 PD'를 맡은 나는 말 그래도 프로그램을 안전하게 송출을 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됨은 물론이고 현장 중계차에서 편집되는 화면에 시청자들이 재미를 더 느끼기 위한 자막을 정확한 타이밍에 넣어야 하는 센스까지 나아가 생방송의 묘미를 살리기 위해 여러 가지 이슈, 데이터를 미리 준비하고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와도 같기 때문에 상황에 따른 데이터를 선택할 줄 아는 감각도 겸비해야 한다. 


그러나 방송이 시작되고 종료될 때까지 "야이~ 새끼야...!"라든지 "아우~ 씨발! 늦었잖아"라는 말을 들으며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실수를 다 받아주기에는 나의 멘털은 이미 지쳐 있었던 것이다. 스포츠 방송에서는 연출이 없다. 그러니까 드라마도 아니며 예능도 아니기에 라이브로 이루어지는 방송은 '진행 PD'라는 호칭이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말 그래도 경기를 진행하는 사람이라는 매우 겸손한 표현이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이런 욕을 하는 선배도 싫었고 하루하루 쌓이다 보니까 지겹고 지겨웠다. 물론 모든 PD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 이런 스타일을 버리지 않고 지속하다 보면 그것은 하나의 지배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너도 나도 누군가의 실수를 묵인하지도 않으며 비판적이고 날만 서 있는 피드백을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때문에 그 조직은 창의성을 잃어간다. 퇴사를 하고 지금 돌이켜 보면 그렇게 욕을 많이 하던 선배도 호르몬의 탓인지, 육아를 하면서 성숙해진 탓인지 욕을 하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나는 욕을 그렇게 싫어했다. 


번 아웃의 또 다른 이유, 노조 사무국장이라는 스트레스 

나의 번 아웃의 첫 번째 이유는 선배의 '욕'이었고, 다른 이유는 다름 아닌 노조 사무국장이라는 위치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회사 측의 견제로 인한 일종의 화병이었다. 노조,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직장인으로 살면서 노조를 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일종의 미친 짓이다. 물론 지금도 나는 노조의 필요성과 대한민국 노동법의 하찮음에 대해서 분노하는 사람이다. 


노조 일을 6년 넘게 해왔으며 이른 나이에 노조 사무국장의 위치까지 올랐으며, 나중에는 차기 노조위원장으로 추대가 될 정도로 동료들에게 많은 신뢰를 받았다. 내가 이런 인정을 받기까지는 6년 간 셀 수 없는 회사의 탄압을 이겨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때로는 좌천을 명 받기도 했고, 휴직을 당하기도 했고, 노조원이 아닌 상사로부터 갖은 압박을 버텨야만 했다. 그러나 나의 성격은 매우 강했고 당시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태도를 지닌, 강성 노조의 사무국장이었다. 위치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던 조직에 만들어진 노조를 나는 강하게 만들었다고 지금도 자부한다. 내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만큼 열정도 있었으며 그만큼 똘끼가 충만하기도 했다. 


단체협상, 임금협상을 거치면서 노조에 대한 원칙과 갖은 협상의 기술들을 배워 나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법을 잘 이해했고 회사 담당 노무사와 친해지면서 나는 법의 논리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러다 법을 공부한다면 어떨까 하는 상황으로 전개가 된 것이다. 그 이후 나의 두 번째 도전은 로스쿨로 향하게 된다. 


"로스쿨을 도전해봐!" 

울음 그친 나는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동거인에게 털어놓았다.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로스쿨에 도전하는 게 어떨까?" 나는 당시 MBA는 관심은 있었지만 로스쿨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알 수 없는 흥분감에 빠져 들었다. 노동법을 공부해보니 이해가 너무 잘 되었고 법리를 공부하고 싶다는 욕구와 함께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힘을 쓰고 돕는 직업을 갖는다는 게 너무 마음에 들었다.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리는데 까지 걸린 시간은 3개월이었다. 아무튼 나의 번 아웃의 원인은 회사에서 시작되었지만 2022년 7월에 느끼는 내 결론은 완전히 달라졌다. 


번 아웃은 내가 만드는 것! 

내가 소진되어서 탈진에 이르고 멘탈이 무너진다는 것은 회사의 사정이 아니었다. 물론 회사의 환경이라는 것은 내게 영향을 주는 첫 번째 직접적인 요인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상당히 지난 지금은 다른 결론에 이른다. 내가 만든 것이라는 관점, 이렇게도 해석이 가능하더라는 것이다. 


조금만 더 현명하게 요령 있게 생활을 했다면, 노조를 그만두고 프로듀서의 일에 더 집중했더라면... 이런 생각도 했지만 더 시간이 지나 보니까 아니더라. 나는 쉬는 것을 몰랐다고 말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분명한 탈진, 번 아웃의 원인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틈틈이 나를 쉬게 하는 요소를 나는 못 찾았다. 어떻게 쉬는지도 잘 몰랐다. 그저 내 일을 열심히 하고 휴가 때 해외를 나가서 쉬고 와서 다시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만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러니까 쉼이라는 단어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갖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쉼, 내게 있어 그 정의는 무엇인가?

번 아웃을 그렇게 겪고서 퇴사를 했고 6개월 정도 호주로 향하게 된다. 영어 공부를 하고 싶었고 또 쉬고 싶었다. 동거인은 허락을 해주었고 심적으로 나를 지지해주었다. 호주에서의 생활도 공부를 해야만 하는 아카데미 과정을 들어갔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는 했지만 나와 나이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나는 내 나이를 잊게 되었다. 어쩌다 방학이 주어져서 서부 호주를 여행하게 되었는데 이 시간이 내게는 지금도 삶의 활력이 되어주고 있다. 


자유인이 되어서 쉬어 보니까 쉰다는 행위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되었다랄까. 나를 편안한 상황에 놓이게 하는 것부터가 쉼의 시작이구나 하는 어떤 확신. 그러니까 내가 쉬기로 했다면 마음을 편안하게 먹어야만 쉬는 것도 제대로 된 쉼이 되는구나 하는 사실을 이때 깨달았다. 번 아웃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리고 모든 인지능력이 저하되고 판단력은 안드로메다로 가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내리는 결정은 딱히 매력적일 수 없다. 하지만 쉬면서 닫혔던 감각이 다시 열리며 바다의 냄새를, 바람의 냄새를, 땅의 냄새를 지각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난 지금도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쉼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여행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은 공연이라고 한다. 이렇듯 여러 가지 형태의 쉼이 있다. 나는 천성이 게으른 사람이기 때문에 매주마다 어디를 방문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가 없다. 물론 지금도 자동차 면허증이 없고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동의 제한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따지고 보면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다른 지역으로 떠나거나 20대에 이미 전국일주를 해본 경험이 있어서 별 필요성은 물론 재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 사람이 지닌 에너지 총량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평소에 에너지 총량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랄총량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누구든 개인이 지닌 에너지 그러니까 지랄을 할 수 있는 총량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이를 달리 말하면, 때가 있다고 애매하게 말할 수 있겠다. 


아무튼 내가 무엇을 할 때 쉰다고 생각하는지, 받아들이는지 곰곰이 살펴보았다. 찾아낸 것 중에 하나가 다름 아닌 독서였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을 때 느끼는 어떤 고양감, 그것은 내게 자극제였다. 자기 개발서를 읽어도 좋은 책이라면 나를 들뜨게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부터 메모를 하게 되었고 투 두 리스트를 작성하게 되었고 어느덧 아침 일찍 일어나서 뭔가 더 돌아보거나 아니면 잠들기 전에 감사의 기도를 하게 되었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쉬는 날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쉰다. 아니다 논다고 표현해 보자. 쉰다는 정의보다 '논다'는 표현이 더 나은 것 같다. 오늘 나는 잠을 푹 잤다. 알람을 설정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점으로 지난밤 마셨던 숙취를 제거하기 위해서 분식집 스타일의 라면을 끓여서 해장을 했다. 그리고 방의 공기를 환기하기 위해서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에어컨을 켰다. 나를 상쾌한 상태로 이끌기 위해서. 그리고 유튜브를 보았다. 평소 즐겨 보는 주제의 영상들을 보면서 캡처를 하고 인스타에도 공유를 했다. 저녁에는 읽어 보고 싶은 <멘탈이 무기다>라는 책을 사러 교보문고에 나갈 예정이다. 나는 이런 일상에 내게 쉼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하고픈대로 놔두면서 나를 적당히 제어하는 것이 내게는 쉼이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은 여전히 있다. 올해 자동차 면허증을 따서라도 주기적으로 어딘가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운전면허증은 항상 필기에 합격하고 나면 실기를 준비할 때 일이 터져서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쉼이라는 단어로 무작정 끄적이면서 얻은 것은 다름 아닌 '운전면허증'이 되어 버렸다.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서와 충분한 휴식, 독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잘 쉬고 있다는 확신과 인지하는 순간의 기쁨이 곧 휴식의 정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글을 읽은 분들의 토요일, 일요일은 어떨지 궁금하다. 하지만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내가 잘 쉬고 있다는 확신과 여유를 잊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일에 지쳐서 쉬고 있을 때 피곤하다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지치고 여유를 잊어버린 상태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작든 크든 쉼의 행위, 공연이든 아니든 특별함이 없어도 쉴 수 있다는 어떤 자신감과 여유가 쉼의 원천이라고 말하고 싶다. 





스쳐 지나가는 분들의 공감과 댓글은 저에게 커다란 힘이 됩니다. 미천한 글일지라도 여러분의 공감은 저의 짧지 않은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이렇게 끝까지 읽어 주심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하루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바라봅니다. 


덧붙여, 퇴고가 없는 그야말로 즉흥적인 글임을 감안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좋아요와 댓글은 저에게 커다란 힘이 됩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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