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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박하 Feb 20. 2020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를 보고

우리 몸에 살고 있는 폭풍



  러시아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작,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이번에 재연으로 돌아온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다섯 명의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말 그대로 폭풍과 같은 연기와 노래 실력을 펼친다.





표도르 까라마조프, 아버지의 죽음


  이야기는 네 형제의 아버지, 표도르 까라마조프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부유한 지주인 그는 방탕한 호색한이자 저열한 어릿광대로 평생을 살아왔다. 결코 존경할 수 없는 이,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손가락질 하던 그는 처참한 시체가 되어 발견되고, 이를 추모하기 위하여 네 명의 아들들이 모인다. 평소 아버지를 증오해 왔고,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공언하고 다닌 첫째 아들, 드미트리가 유력한 용의자로 수감된다.


  표도르 까라마조프의 죽음을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다. 둘째 아들, 이반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죽을 사람이었다'라고 말한다. 그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원한을 사고, 모범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 왔던 표도르 까라마조프. 그는 무대에서 말한다. 삶을 사랑한다고. 너무나 사랑해서 추잡할 정도였다고. 어쩌면 그의 삶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사랑의 표현이, 방식이, 전달이 너무나 추잡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모든 것을 용서해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때로 사랑은 폭력이 되고 상처가 된다. 표도르의 사랑은 너무나 추악하고, 괴팍한 것이었다. 삶을 사랑하고 여자들을 사랑했다는 표도르 까라마조프의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옳은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네 명의 형제들은 각각 용의선상에 오르게 된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언제든, 누구에게든 죽을 사람이었던 표도르. 과연 그를 살해한 것은 누구인가. 누가 가장 그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는가.




드미트리, 다만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네 명의 형제들은 네 개의 모서리에 각각 위치한다. 그 중에서 왼쪽 모서리에 수감되어 있는 드미트리는 자신을 찾아 온 셋째 아들, 알료샤에게 말한다. 사랑하는 연인, 그루첸카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고. 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수감되어 있는 지금도, 미친 놈처럼 그루첸카가 보고 싶다고.


  평소 아버지와 여자 문제, 돈 문제로 잦은 다툼을 벌였던 드미트리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아버지의 더러운 피를 모두 뽑아 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에 맞서 아버지, 표도르 역시 자신의 몸에서 가장 더러운 피라고 드미트리를 칭한다. 이토록 서로를 증오하는 두 사람이지만 그들은 사실, 많이 닮아 있다. 무대에서 마주보고 죽으라고 악을 쓰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더욱 거울에 비치는 것 마냥 선명해진다.


  드미트리는 사실 약혼녀, 까체리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루첸카를 열렬히 사랑한다. 그리고 표도르 까라마조프는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인 그루첸카를 빼앗아 오려 한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증오한다고 외치는 두 사람. 까라마조프가의 엉망으로 뒤엉킨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까. 앞서 말했듯 사랑을 이야기하는 두 사람이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온전히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배덕하고 타락해 있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죄값을 치르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는 이들. 사랑하기에 저지르는 행동들이 오히려 죄악이다.




이반, 내가 믿는 것은 확실한 증명과 증거 뿐


  그런 드미트리의 죄를 누구보다도 확신하는 것은 둘째 아들, 이반이다. 그는 부친 살해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죄이며 당연히 엄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사설을 기고하기도 한다. 표도르 까라마조프가 죽던 날, 모스크바에 있던 그는 확실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다. 피가 묻은 쇠공이와 피 묻은 채 발견된 드미트리의 옷.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이반은 말한다. 자신은 오로지 증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며, 내가 믿는 것은 확실한 증명뿐이라고.


  그러나 과연 이반은 증거를 가지고 드미트리를 의심하는 것일까? 이반은 사실 드미트리의 약혼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드미트리의 죄가 분명하다면, 그래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면 그의 약혼녀와 원없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표도르 까라마조프의 유산까지 받을 수 있다. 그리 넉넉하지 못한 지갑 사정을 가지고 있었던 이반에게 모든 것이 행운처럼 굴러들어온다. 이 모든 것이 과연 우연일까? 혹은 치밀하게 계산된 상황일까?


  이반은 냉철하고 냉정하며 이지적인 인물이다. 그는 신을 믿지 않으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혹은 존재하되 철저히 비난 받아야 하는 것 같다. 셋째 아들, 알료샤에게 '확실한 악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이반은 자신의 논문에서 철저히 신을 부정하고 신성모독적인 발언들을 일삼는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이반이 얼마나 신을 믿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가 된다. 신을 믿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신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신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열성적으로 존재를 부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알료샤, 믿음으로써 모두를 구원하려는


  사제 견습생인 알료샤는 온건하고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의 죽음을 가장 슬퍼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쩌면 그는 신을 믿는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고 믿고, 신을 부정하는 이반과 대립하는 알료샤는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신께서 아버지와 드미트리 형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신은 있는 것일까?


  신을 믿기에, 모든 형제들의 결백과 무죄를 믿기에 가장 나약하고 여려 보이는 알료샤는 어쩌면 극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알료샤의 믿음에는, 신앙에는 무언가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까라마조프가의 피를 타고난 그는 정말로 결백한 인물일까? 아버지의 죄악에서 그는 무죄일까? 믿음에는 증거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알료샤는 무엇 때문에 신을 믿고 있는 걸까. 넷째 아들, 스메르자코프는 알료샤를 향해 아버지의 더러움에 몸서리쳤다고 말한다.


  알료샤가 아버지를 정말 사랑했다면 그의 삶에 간섭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가 비뚤어지고 망가지는 것에 진심 어린 진언과 충고를 건네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이니까. 그러나 알료샤는 아버지를 바로잡고 모든 것을 책임지는 대신,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수도원에 가는 것을 선택했다. 과연 그는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형제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추잡한 사랑을 했던 표도르, 드미트리와는 반대로 알료샤는 사랑하는 것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것을 수도복을 입고 있는 자의 결백하고 무결한 태도로 봐야 할까? 아니면 모든 것으로부터 그저 달아나고 싶어 도망친 자의 도피로 봐야 할까?




스메르자코프, 이반 도련님의 충실한 추종자


  넷째 아들, 스메르자코프는 표도르 까라마조프의 사생아다. 아버지가 불분명하지만 표도르는 스메르자코프를 거두어 자신의 하인으로 부렸다. 태어나면서부터 발작을 하는 스메르자코프는 시종일관 무언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것을 홀로 보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표도르 까라마조프가 죽던 날 발작을 일으켰던 스메르자코프는 세 명의 형제들 중 이반 도련님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이반의 논리와 지식에 매료되어 있는 그는 이반의 모든 논문과 글을 훔쳐 읽는다. 그리고 그것을 달달 외워 이반의 앞에서 읊기까지 한다. 이반이 쓰고 있는 '대심문관 서사시'의 다음 내용을 궁금해 하기도 한다. 다소 덜떨어진 것 같은 어눌한 말투와 행동과는 다르게, 섬뜩하리만치 날카로운 말을 던지는 스메르자코프는 한편으로는 알료샤에게 분명한 적의를 보인다. 어쩌면 무신론자이자 신을 비방하는 이반의 추종자로서는 당연한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스메르자코프가 알료샤를 비난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사제 견습생이기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늙은 고양이의 목을 졸라 죽이면서도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스메르자코프는 이반에게 말한다. 그날 밤 저는 발작을 일으켰고, 도련님은 모스크바에 계셨으니까요. 그 말에 이반은 크게 동요한다. 그리고 스메르자코프를 추궁한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스메르자코프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들을 늘어놓는다. 그 말의 숨겨진 의미들은 무엇일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가장 천한 곳에 가장 은밀한 것이 숨어 있다.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사랑과 증오, 선과 악


  극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이 대립한다. 대표적으로 드미트리와 이반이 대립하고, 이반과 알료샤가 대립하며, 알료사와 스메르자코프가 대립한다. 그들은 각각 선을 말하고, 신앙을 말하며, 증오를 말하고, 죄를 말한다. 그리고 가장 커다란 죄, 아버지를 죽인 아들의 죄는 누구에게 있을까.


  알료샤는 드미트리의 결백을 믿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의심의 싹을 틔우게 된다. 드미트리는 무죄를 주장하지만 마지막으로 자신을 믿어주던 알료샤마저 떠나갈 기미가 보이자 모든 희망을 잃게 된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이를 한 번만 더 보고 싶다고 말하는 드미트리를 보면서 알료샤는 고민한다. 어째서 드미트리 형의 말이 가장 진실되어 보이는 걸까. 사랑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일까.


  이반은 스메르자코프의 말이 신경쓰인다. 이반 도련님은 모스크바에 있었으니까요.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왜 스메르자코프는 굳이 이반에게 그것을 강조했을까. 마지막 희망을 잃고 자신의 모든 죄악을 회개하는 드미트리에게 이반은 네가 범인이라고, 네가 범인이어야 한다고 악을 쓴다. 믿고 있던 것이 무너지고, 알고 있던 것이 모르는 것이 되는 순간. 그 순간이 바로 폭풍처럼 밀려온다. 두려운 순간이 찾아온다.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누가 아버지의 죽음을 가장 원했을까.


  <브라더스 까라마조프>는 인간 본성의 선과 악, 내면의 나약함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극을 꿰뚫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다. 형태가 일그러지고, 괴팍하고, 끔찍하기까지 한 사랑. 그러나 진심이 담겨 있는 사랑. 그리고 그런 사랑마저도 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두려운 인간. 과연 가장 선한 존재는 누구이고, 가장 악한 존재는 누구인가. 인간의 의지는 무엇에 앞서는가. 한없이 탐미적인 소재인 장미와 모래, 물과 흰 천을 사용하면서 한편으로는 한없이 추한 인간의 일면을 보여주는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또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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