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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박하 Jan 16. 2022

글을 쓰는 이유

아주 짧게 머물렀다가 떠나는 시선이라도.







  MBTI가 유행하는 요즘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과 정체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듯하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나고 어떤 말을 들을 때 더 기쁜지에 대해 알아 두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취미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잠깐이라도 현실에서 벗어나 몰입할 수 있는 취미. 나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취미. 힐링이 되고 기분 전환이 되는 취미.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이나 바이올린 학원에 다녔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혹은 태권도나 발레, 수영. 자신에 대해 알아 두는 것은 여러모로 좋다. 위기의 순간이 닥쳐왔을 때 차분하게,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진정하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위기의 순간은 다양하게, 수시로 찾아온다. 경제적 위기. 사회적 위기. 정서적 위기. 삶을 위협하는 많은 위기를 현명하게 헤쳐나갈 수 있다면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많은 위기의 순간을 겪었지만, 불행은 커다랗고 위협적인 한 방으로 나의 삶을 때릴 때도 있고 잔잔하게 가라앉아 발목을 간지럽힐 때도 있다. 커다란 한 방을 맞으면 정말로 살고 싶지 않고, 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주저앉으면 언제나 나의 곁에서 잔잔히 발목을 간지럽히던 그 위기가 내 몸을 적신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쉽게 극복해내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겪고 있는 잔잔한 위기는 외로움이다. 새벽에 드는 생각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또 극단적이니 깊게 몰입하지 않는 게 좋다고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늦은 밤이 찾아와 미처 잠들지 못한 때에는 어김없이 외로움이 찾아온다. 어떤 사람들은 깊은 외로움에 잠겨 꼼짝도 하지 못한다.


  본질적인 나를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외로움. 작년에는 책을 한 권 필사했는데, 그중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고통은 몸의 일이므로 다른 누구와 공유하지 못하고 온전히 자신의 것이며 그것은 내 몸을 누구와 공유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그러니 아픔을 나눌 수 없음에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기억은 희미하지만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나는 새벽 세 시에 잠이 오지 않아 일어나 앉아서 책을 필사했는데, 마침 그 책에 새벽 세 시라는 구절이 나왔다. 뜻밖의 우연으로 나는 반가웠다. 아무 의미 없는 우연이고 책의 저자는 나를 알지도 못하지만 그 순간, 새벽 세 시에 깨어나 책상 앞에 앉을 나를 위한 문장이 존재했다. 어떤 우연은 마치 기적이나 계시처럼 느껴진다.     


  이전에 정신과 상담을 받을 때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행복하면 무엇을 하시나요?’ 나는 그 행복한 순간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행복했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밤에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걱정과 불안이 밀려온다. 애써 그 생각들을 밀어내고 행복한 상상을 하며 잠을 청하려 해도 잘되지 않는다. 행복한 순간은 너무나 짧고, 순간이고, 금방 사라진다. 나의 기억은 아무래도 온전하지 못한 것 같다. 이렇게 행복한 시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수가. 내가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것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순간들은 전부 슬프거나 외롭거나 힘들었던 기억들이다.     


  그래서 나는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대답한다. 지나온 10년을 다시 견디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견딜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마 10년 뒤의 나도 10년 전으로는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젊음과 청춘, 도전하지 못한 순간들을 후회한다고 하지만 나는 다시 돌아간다 해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저 순간을 버티고, 또 견디고, 어떻게든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적당한 취미를 만들지도 못했고, 행복한 추억으로 도피할 수도 없는 나는 외로움을 견뎌내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중에서 하나, 글을 쓰는 일이 그나마 잘 맞았다. 어릴 때는 노트에 빼곡하게 어디론가 달아나는 상상을 채워 넣었고, 내가 겪었던 일에 약간의 환상을 섞어 소설로 쓰기도 했다. 나의 세계 일부를 구현해내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었을 때, 누군가는 대답해주었다. 나는 그 대답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건네었을 때 반응이 온다는 것. 누군가 나의 세계를 들여다본다는 것. 그건 마치 ‘이해한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외롭지 않았다.     


  그때의 짧았던 기쁨이 계속 글을 쓰게 만들었다. 물론 언제나 좋은 글을 쓸 수는 없었다. 어떤 글은 외면받았고, 어떠한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떤 글은 반응이 있었다. 아주 사소한 반응이라도 나는 기뻤다. 누군가는 창작의 이유가 타인의 세계에 간섭하여 영향을 미치기에 창작에 빠져든다고 한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에도 예술가는 참 돈 안 되는 직업이다. 내 경우에는 직업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이지만, 그래도 창작을 놓을 수가 없다. 본질적으로 외롭기 때문이다. 이 외로움을 덮을 방법이 누군가의 대답뿐이기 때문이다. 아주 짧게 머물렀다가 떠나는 시선이라도.     


  언젠가는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언젠가는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까닭은 아직 지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면 창작 윤리와 작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언제나 조심스럽다. 대신 나는 사람의 심리에 대한 공부를 했다. 교수님은 강의를 듣는 학생 중 한 명이 작가가 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교수님. 저는 아직 부끄럽지만 작가 비슷한 것이 된 것 같습니다. 이것 말고는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울한 시대다.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고, 현실의 문제는 지나치게 무겁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바쁜 요즘,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많은 사람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사는데, 나는 아직 철이 덜 든 걸까. 포기하고 싶지 않다. 포기하면 살 수 없을 것 같다. 의사 선생님의 질문을 나는 그대로 돌려드렸다. ‘선생님은 행복할 때 무엇을 하세요?’ 좀 더 괜찮은, 정상에 가까운, 우울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죠.’ 어쩌면 나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에는 아직 덜 행복한지도 모른다.


  돈이 되면서 사람들의 반응이나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나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 외로움을 다스리기 위해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내 노력의 방향이 잘못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은 잘 모르겠으니. 언젠가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을까. 언젠가는 누군가 대답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조금만 더, 살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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