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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박하 Mar 10. 2022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계속 살아간다









  1990년 백말띠에 태어난 여자아이는 성격이 드세고 팔자가 사납다는 속설이 있었다.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여자들. 자연 성비는 105였지만 남자가 116명이 태어날 때 여자는 100명이 태어났다는 기록적인 성비. 



  딱히 팔자나 사주를 믿지 않아도 여자아이는 무수한 이유로, 또 숱한 이유로 지워지고 사라졌다. 대를 이어야 하니까. 노후를 대비해야 하니까. 시집갈 때 기둥뿌리를 뽑으니까. 딸에 딸을 낳고 딸을 낳으며 아들을 낳을 때까지 기다린 집안이 너무 많다. 누나가 서너 명씩 있는 막내아들. 그 막내아들을 낳기까지 사이사이 지워지고 사라진 여자들. 어쩌다 또 딸을 낳으면 이번에도 계집아이냐며 눈을 부라리고 핀잔을 주던 어른들에게 눈칫밥을 먹어 가며 컸던 여자들. 네가 남자아이였다면~ 으로 시작하는 말을 들으며 자란 여자들. 내가 죽으면 재산은 남자에게만 줄 거다, 라고 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부모가 죽어도 상주가 되지 못한 여자들.     



  페미니즘이 무슨 테러와 같은 선에서 취급되는 요즘, 그러나 우리는 더욱 강해진다. 여성혐오, 미소지니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20, 30대 여성의 표를 없는 것과 다름없다 취급한 정당의 대표가 대통령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 이곳에서 자리를 지킨다. 우리를 위해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준 사람을 지지하고, 우리를 위해 더 많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우리는, 연대하고 또 변화한다. 죽은 언니들과 동생들의 몫까지 짊어진 우리는 앞으로 태어날 동생들과 우리의 후세대 여성들을 위하여 계속 살아남는다.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낸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여기 있다고, 우리도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소유물 혹은 재산으로 취급되었던 존재에서 이제는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로 성장하기까지 무수한 피가 흘렀다. 무수한 희생이 있었고, 비웃음과 조롱이 있었다. 우리는 하이힐을 벗고 코르셋을 벗으며 더욱 강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한 명의 인간으로 존중받고, 대우받고, 인정받기 위하여. 한 명의 사회 구성원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기 위하여.     


  죽으라고 등을 떠밀어도 죽지 않을 것이다. 나의 삶은 소중하고, 나의 것이며, 동시에 모든 여성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여성은 힘을 가지고 있다. 데이트 폭력으로 혹은 낯선 남자에게 살해당한 모든 여성을 위하여 우리는 존재한다. 가정 폭력에서 살아남고 취직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일을 하고 내일을 위해,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꿈을 꾸는 여성들을 위해 우리는 존재한다. 같은 일을 해도 같은 돈을 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일을 하기 위해 잠자리에 들고 시간 맞춰 아침에 일어나는 모든 여성들을 위해. 그렇게 일하고 또 집에 와서 집안일을 해야 하는, 나의 시간을 잃어버린 여성들을 위해. 너는 나와 같은 삶은 살지 말라고, 너는 나와 다른 삶을 살라고 말해 준 엄마를 위해. 나의 언니와, 동생과, 친구를 위해 우리는 존재한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죽지도 않는다.     



  우리는 지지 않았다. 20대의 여성은 30대의 여성이 되어, 30대의 여성은 40대의 여성이 되어, 40대의 여성은 50대의 여성이 되어……. 우리는 계속 존재한다. 10대의 여성은 20대의 여성이 된다. 우리는 계속 살아남아 계속 표를 던지고, 목소리를 내고, 주장을 하고 후원을 하고 각자의 삶을 지키면서 서로의 삶에 든든한 방파제이자 등대가 되어 준다. 우리의 존재는 또 다른 존재를 위한 별이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빛나고, 함께 빛나 밤하늘을 밝힌다. 혐오에 맞서는 사랑으로 우리는 연대한다.     








  잠깐 무너져도 괜찮다. 잠깐 힘들어서 쉬어 가기로 해도 괜찮다. 너무 마음이 안 좋아서, 괴로워서, 슬퍼서, 우울해서. 그래서 잠깐만, 오늘만 좀 모든 걸 놓고 쉬기로 해도 괜찮다. 우리는 우리를 다스리고, 챙겨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괜찮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한다. 그렇게 오늘을 견뎌내면 다시 내일이 온다. 다가오는 내일에서 우리는 다시 존재한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곳, 여기, 지금에 자리한다. 내일을 위해. 미래를 위해.     



  80살, 90살이 될 때까지 살 테다. 살아서, 또 표를 던질 것이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주장할 것이고, 주장하기 위해 공부할 것이며, 더 많은 책과 글로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사랑을 주장하고, 포용하며, 이해하고 응원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 있다. 살아서. 어엿하고 떳떳하게 존재한다.     



  우리의 존재가 바로 오늘의 승리이기에.     


  존재하는 것 자체로도 우리는 이미 숱한 성공을 해낸 것이기에.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사라지지도, 없어지지도, 죽지도 않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다. 오롯한 우리의 삶은 곧 길이 되고, 표지판이 되고, 뒤따라올 모든 이들을 위한 선례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 걷는다. 꾸준히, 우직하게, 끊임없이, 계속.     



  계속,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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