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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박하 Dec 24. 2024

24년의 동지, 남태령에서

가장 길고 가장 추웠던 밤을 밝히며









12월 21일에 나는 무척 피곤했다. 20일에 새 집으로 이사했는데, 1인 가구에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챙길 것도 신경 쓸 것도 정말 많았다. 기절하듯 잠들고 일어난 21일, 새 집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아직 정리하지 못한 짐을 정리하고 가구의 배치도 이리저리 바꿔보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트위터에 다급한 소식이 올라왔다.



12월 2일까지만 해도 나는 천천히 블루스카이로 계정을 옮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12월 3일, 가장 빠른 소식을 전해 준 트위터 덕분에 나는 국회로 달려갈 수 있었고 그래서 나는 다시 트위터에 눌러 앉게 되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혼란스러운 시국, 트위터는 실시간으로 많은 정보를 받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번에도 트위터가 가장 많은 정보를, 그리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트랙터를 타고 상경하는 농민들의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나의 고향은 전라북도 전주이고, 돌아가신 할머니는 농사를 지으셨다. 둘째 큰아버지도 내가 어렸을 때는 커다란 비닐 하우스에서 다양한 작물을 길렀다. 하지만 내가 호남의 시골 출신이 아니었어도 농촌과 농민들에게 관심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쌀로 만든 밥을 먹고 자랐으며 우리의 밥상은 우리의 농산물로 가득하니까. 이 추운 날씨에 속도도 느린 트랙터를 타고, 바퀴가 상하는 것을 감수하며 상경하는 농민 분들이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때 들려온 소식은 남태령에서 경찰들이 트랙터를 막아섰다는 소식이었다.








실시간 현장 사진과 함께 여러 가지 소식이 올라왔다. 마침 광화문에서 집회가 끝났기에 광화문에 있던 시민들에게 남태령으로 와 달라고 부탁하는 트윗이 보였다. 시민들이 지켜주지 않으면 농민 분들이 연행될 거라고, 지방에서 경기도까지는 경찰의 안내를 받으며 아무 문제 없이 올라오던 트랙터 열 일곱 대가 왜 서울에서 막히냐고. 트랙터가 도로 교통을 방해하기에 막는다는 경찰의 일방적인 통보는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다. 애초에 트랙터는 차선을 하나 혹은 두 개 정도만 사용하며 올라왔고 앞서 말했듯 지방에서 경기도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서울.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는 가장 번화하고 발달한 도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시이자, 모든 지방에서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혹은 더 좋은 일자리를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곳. 바로 그 서울이 지방에서 트랙터를 타고 올라온 농민들의 진입을 막아섰다는 것은 무척 상징적일 수밖에 없다. 우습지 않은가. 지방은 사람이 없어 소멸하고 있는데 서울은 사람이 발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인구가 빽빽하다. 모든 편의 시설과 함께 문화, 관광을 비롯한 각종 서비스와 정부, 사회 안전망까지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는 서울에 살면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서울은 지방에 빚이 많다. 각종 쓰레기 처리 시설을 비롯하여 혐오 시설을 모두 지방으로 몰아 넣고 반대로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대학이나 큰 회사, 사업 등은 독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주제에 자신의 살을 깎아 가며 트랙터가 훼손되는 것을 감수하며 생계를 포기하고 단지 목소리를 내기 위해 올라오는 농민들을 막는 것인가. 지나치게 이기적이지 않은가.




농민들은 어떠한 폭력도 사용하지 않았고 그저 신고한대로 평화롭게 이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농민들을 경찰은 경찰 버스로 길을 막고 트랙터 유리를 깨고 농민을 때리며 트랙터에서 끌어내렸다. 그런 현장 소식이 들려오면서 많은 사람이 남태령으로 향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남태령은 집회가 허락되지 않은 곳이니 응원봉을 꺼내서도 안 되고, 구호를 외쳐서도 안 된다는 말이 올라왔다. 길이 막혀서 구경하러 왔다, 집에 가는 중이다, 같은 말로 둘러대며 모이라는 조언이 올라왔다. 나중에 보니 이것도 우스운 말이었다. 국민은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가지고 집회는 허가받는 것이 아닌 신고하는 것이다. 집회를 금지할 수 있는 법은 없다.


상황은 좋아지면서 동시에 안 좋아졌다. 경찰들의 수가 늘어나고 시민들의 수도 늘어났다. 경찰들이 진압 방패를 꺼내 놓았고 막차는 끊겼다. 사람들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게 되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이탈하는 새벽이 되면 폭력적인 진압이 시작될 거라는 추측이 돌았다. 여경이 등장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그것은 진압 작전이 있다는 의미라는 말도. 여성을 연행할 때 남자 경찰이 연행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여성을 연행하기 위해서는 여경들이 동원된다는 말이었다. 그곳에는 광화문 집회가 끝나고 달려간 여성들이 많았고 소식을 듣고 집에서 달려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경찰의 진압 앞에서 농민들을 지켜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집에서 전농TV 라이브를 시청하고 있었다. 라이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현장을 보면서 트위터에 올라오는 소식들을 살피고 있었다. 트위터에 올라오는 기부 소식을 라이브 채팅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농민 분들이 한 끼도 드시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누군가 닭죽을 남태령역으로 배달시켰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위한 또 다른 음식과 물품들이 계속 배달되고 있었다. 나는 국민 신문고에 남태령 교통 통제를 항의했고, 교통을 통제하고 있는 경찰들이 방배경찰서 소속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02-182 경찰 민원으로 전화해서 방배경찰서를 연결해 달라고 했다. 전해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방배경찰서 상황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통화중이라는 안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통화중이라는 안내가 반복되었다.




처음 번호를 전달받은 뒤 이 번호로 전화했을 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182로 전화를 걸어 방배경찰서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다른 번호가 없는지 물어보았다. 다시 받은 두 번째 번호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와중에 현장에서는 22시 41분에 경찰 버스를 철수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때 시간이 아마 21시 50분쯤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시간을 보면서 왜 이렇게 늦게 열어주는 건지 불만을 가졌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22시 41분에 경찰 버스를 치워 주겠다는 경찰의 말을 믿지 않았다. 12월 3일 이후 나는 경찰을 믿지 않게 되었다. 12월 3일, 방패를 앞에 짚고 우리를 막아선 경찰들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었다. 12월 7일 국회 앞 집회에서 경찰들은 국회 앞 도로를 통제하는 대신 횡단보도를 막아섰다. 사람들이 길을 열라고, 비키라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집회가 시작하는 시간, 3시를 넘었을 때에도 경찰들은 횡단보도를 막고 시민들의 통행을 방해했다. 그때 경찰은 20분인지 30분인지, 시간이 되면 길을 열어 주겠다고 말하며 시민들을 진정시켜 놓고 시간이 되었을 때 길을 터 주지 않았다. 집회 진행측과 민변과 기자와 국회의원과 많은 사람이 와서 항의한 끝에 간신히 길이 열렸던 것을, 나는 보았다.


그래서 22시 41분에 경찰 버스를 치워 준다는 경찰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시간이 지났는데도 경찰 버스는 여전히 길을 막고 있었다. 아주 잠깐 경찰 버스가 비키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길을 열어 주기 위한 게 아니라 사당 IC에서 더 견고한 차벽을 쌓고 앞뒤로 포위하여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알았다. 경찰들이 뒤쪽 길도 막고 있었다는 것을. 교통 CCTV를 통해 사당 IC에 실제로 경찰 차벽이 2중, 3중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택시를 타고 출발했다.


남태령으로 목적지를 찍고 가면서 경찰에 의해 막혀 있는 곳에서 내려 걸어 가면 될 것 같았다. 기사님은 경찰들이 왜 차를 막고 있는지 의아해하셨고, 나는 트랙터와 농민들 이야기를 간략하게 전해 드린 뒤 택시에서 내렸다. 새벽 2시 반이었다.


가는 길 중간에 화장실이 급해서 주유소 화장실에 잠시 들렀다. 그곳에는 농민들을 지키기 위해 나온 여자들과 남자 경찰 몇 명이 함께 있었다. 여자들의 수가 너무 많았고 화장실은 한 칸 뿐이었기 때문에 잠시 남자 화장실도 함께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좀 늦게 온 남자 경찰들이 남자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옆에 있던 사람들이 경찰들에게 이것저것 질문했다. 어디 소속이냐고 묻자 대답하지 않던 그들은 방배경찰서 소속이 아닌지를 묻자 아니라고 대답했고, 기동대인지를 묻자 그렇다고 대답했다.


현장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적지도 않았다. 나는 응원봉과 핫팩 스무 개 정도를 들고 갔다. 사실 갈 때까지만 해도 나는 새벽 안에 차벽이 열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옷차림이 그렇게 두껍지 않았다. 하지만 남태령의 바람은 무척 차가웠고 아스팔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발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나중에 보니 그곳이 산과 산 사이의 외지고 황량한 곳이라고 한다. 작은 마을에는 편의점도 없이 슈퍼만 있다고 한다. 그곳에 농민들을 고립시킨 것은 정말 물도 마시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하고 얼어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각종 물품과 음식들이 계속 배달되고 있었다. 자진해서 봉사자로 나선 사람들이 목청껏 담요 필요하신 분, 핫팩 필요하신 분, 김밥 드실 분, 등을 외치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무엇을 먹으면 체할 것 같아 음식을 받지는 않았지만, 손이 시려워 장갑을 나눔 받았다. 그 외에도 보조 배터리와 팥죽 나눔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어묵 트럭이 와서 몇백 인분의 어묵을 준비해 주었다. 미리 도착해 있던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응원봉을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핫팩과 응원봉만 들고 온 나를 위해 지인이 광화문에서 썼던 깃발을 나누어 주었다. 그것을 깔고 앉은 덕분에 냉기를 견딜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무척 추운 날이었다.


그날이 바로 동지였다. 일년 중 가장 밤이 긴 날. 그리고 올해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기도 했다.


장갑이 없었으면 손이 꽝꽝 얼어붙었을 텐데, 나눔해주신 분에게 무척 감사했다. 핸드폰으로 온도를 확인해 보니 영하 7도였다. 경찰 버스가 약간 뒤로 물러나면서 우리도 트랙터와 함께 수방사 건물 앞을 지났고,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면서 나아갔다. 옆으로 트랙터가 지나갈 때는 다 함께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얼마 안 가서 다시 멈춰야 했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으면 더 많은 우리가 와 줄 테니까. 국회의원과 기자들도 오고 있었다. 더 많은 우리가 모일수록 우리는 더 강해진다. 우리가 서로의 손을 잡아 줄 때 우리는 더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나긴 밤이 끝나고 올 아침을, 그 아침과 함께 올 첫 차를, 그 첫 차를 타고 올 더 많은 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면서 우리는 다양한 노래에 맞춰 '차 빼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덕분에 잘 몰랐던 최신 유행 K POP도 많이 배웠다.


동지를 지나면 밤은 점점 짧아진다. 그렇게 봄이 오게 되는 것이다. 일 년 중 가장 춥고, 어둡고, 길었던 그날 밤을 밝힌 것은 함께하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과 응원봉의 불빛 그리고 우리의 눈동자였다. 라이브 방송으로 2만 명이 함께 했고, 다양한 난방용품과 음식들이 끊임없이 배달되었다. 깃발이 펄럭이고 함께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었고 손을 잡아 주는 손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함께였다. 성 정체성이나 연령과 출신과 사는 곳과 그 어떤 것과 상관 없이 그곳에 함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무척 많은 상징성이 있었던 밤이었다. 현대판 우금티였던 남태령. 마침내 서울로 들어오는 것에 성공한 농민들. 마침 또 남태령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관저 앞에서의 집회가 가능한 날이 되었다고 한다. 그냥 놓아 두었으면 광화문에 와서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갔을 트랙터들을 공연히 막아 서서 더 많은 사람이 남태령에, 농민들에게, 양곡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전농에도 많은 후원과 관심이 쏟아졌다. 새벽, 몸이 너무 얼어붙어 더 버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차를 가져온 지인이 있어서 다행히 택시를 잡을 수 있는 곳까지 나와 택시를 부를 수 있었다.


이후 무사히 길이 열리고 트랙터가 한남동까지 진출해 집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시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귀가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내 안심이 되었다. 그 뒤로 많은 기사도 올라오고 그곳에 함께 있던 사람들의 후기와 브이로그, 정리된 영상 등도 올라왔다. 국회에서도 이번 사안을 심각하게 다루어 주었다. 변하고 있었다. 나아가고 있었다.








그날, 트위터로 소식을 전해 준 최초의 농민이 없었다면 남태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광화문 집회가 끝나자마자 그곳으로 달려간 사람들이 없었다면 진압 작전이 시작되어 모두 연행되었을 것이다. 그 상황을 계속 라이브로 촬영해 주지 않았더라면 무엇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갑을 나눔해 준 사람이 없었더라면, 그곳에서 발언하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추운 사람들이 잠들거나 저체온증으로 의식을 잃지 않도록 챙겨 준 사람이 없었더라면, 음식을 나눔해 준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우리 중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그 밤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순간이 무척 많았다.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사는 것에 대한 의미와 이유와 원인을, 목적을 계속 찾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차라리 죽어버리려고 한 때도 있었다.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알 것 같다. 삶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나의 삶에 이유를 만들어 붙여 주면서 살아가다 보면 왜 살아야 하는지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끝나지 않는 밤은 없고,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겨울의 가장 긴 밤이 지나고 새로운 아침과 함께 봄이 온다. 해가 뜬다. 다시 올 봄을 우리는 함께 기다린다. 손을 잡고,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온기를 나누며. 곧 다가올 따스한 봄날의 아침을, 우리는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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