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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Apr 16. 2017

주말에 관한 기록


깨어 보니 오후였다. 저무는 햇살이 커다란 창문으로 비춰 들어와,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있던 책들이 빛났다. 크고 단단한 표지를 지닌 저 책들 위로 길게 늘어지던 라임스킨의 새잎일수록 연한  연둣빛을 띄는 잎사귀와 가는 가지를 흔드는 햇살들이 글자들을 읽으며 가벼이 출렁거렸다. 오래된 이야기들과 먼지처럼 점점이 반짝이는 묘하고 가벼운 설렘들이 공기 중에 뒤섞여 떠다니고 있었다. 해가 저물기 직전의 이 공기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나는 옅은 올리브색의 린넨 커튼이 햇살을 받아 어떻게 빛나는지 보았고, 커튼을 둥글게 흔드는 바람을 보았고, 바람을 따라 부드럽게 일렁이는 햇살들을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커다랗게 열어놓고 볕과 바람을 들여놓았던 베란다 창문을 통해, 주말 오후, 놀이터에서 한껏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들이 덩달아 난간을 타고 들어와 거실 구석구석 배어 있었다.

   


아, 지금은 오후 5시를 조금 넘긴 시각, 저 멀리로 보이는 산등성이로 넘어가는 햇살은 아직은 부드러웠고,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가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발밑으로 어둠이 밀려들지 않았으며, 아직은 충분히 밝고 환했으며, 적당한 서늘했으며, 기분 좋을 만큼의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분명 그간의 누적된 피로에 의해 나의 낮은 미처 알 수 없이 흘러가버렸지만, 눈을 떠보니 나는 평화로운 시간 위에 서 있었다. 이 평화로움과 직시한 순간, 이미 나의 하루는 충만하게 가득 차 있었다.

     


사랑이 저물기 전

     

잠들기 전, 나는 사랑에 관한 단편집을 읽었다. 사랑에 대한 단편들을 읽으면서 기쁘고 슬프며 황폐하고 치열한 사랑에 대한 여러 시선들을 보았다. 사랑에 대한 기억은 저마다 다르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사랑이 시작될 때와 서로 사랑할 때, 그리고 사랑이 저물 때의 기억들은 모두 다르다. 활자 속에 숨겨진 사랑의 체취를 따라가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사람들 사이의 아픈 기억을 따라, 몇몇 활자들을 따라 읽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곤 했다.


잠시 눈을 떠보면 문자가 와 있거나 아니면 누가 잠시 벨을 누르기도 했다. 혹은 잠깐 사이에 꿈을 꾸기도 했다. 네가 있거나, 없는 순간의 기억들. 사랑의 체취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놓아버린 기억들을 다시 눈앞으로 가져온다는 것.


그때, 나는 너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혼자 도서관에서 쓸쓸하게 책을 꺼내 들고 있었는데, 문득, 갑자기, 알게 되었다. 이 사랑이 끝났다는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알아왔고, 너를 사랑해왔고, 너 또한 나를 기다리고 사랑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난 우리는, 이미, 사랑의 본질을 잃어버렸고, 그 길고 길었던 사랑이, 드디어, 종말을 맞이했다는 것을, 문득, 갑자기, 알게 되는, 그날의 쓸쓸한 공기를, 잘게 흔들리던 잔향과도 같았던, 실오라기 같았던 가늘고 길었던 마음의 끈이, 그렇게 끊어져버림을, 그날, 갑자기, 깨달아버린, 그날, 그 오후.


그러므로 그 계절 그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이다지도 쓸쓸해지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책장을 덮으며, 다시 곤한 잠을 청한다. 눈을 뜬 순간에는, 사랑이 저물기 전, 그 순간 속으로, 다시, 기억을 되돌려 그때의 어린 너를 만나면, 나는 여전히 두 팔을 벌려 너를 안을 것임을, 너는 알고 있을까, 내 어리던 사랑아.



잠에서 깨어

    

거실에서 다시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싱크대 위에 도마를 꺼내 놓는다. 요리에 대한 의외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 것은 불과 한두 달 전부터다. 냉장고를 열어 꽈리고추를 꺼내 씻는다. 옆에는 인터넷에서 찾은 레시피가 핸드폰 화면 위로 커다랗게 놓여 있다. 통, 통, 아직은 도마질 소리가 서툴다. 레시피를 다시 읽어본다. 간장은 몇 숟갈, 고춧가루 몇 숟갈. 레시피는 나 같은 요리 초보도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고 친절하다. 며칠 전엔 지인들과 함께 있으면서 돼지고기에 콩나물과 깻잎을 넣어 고기를 볶았다. 고추장으로 간을 한 거라 술안주로 제격이던 돼지고기 콩나물 볶음에 다들 소주 한 잔을 곁들여 마셨다. 이렇듯 지인들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는 즐겁다. 이런 나를 보면 너는 또 뭐라고 말할까. 탁탁탁, 도마질 소리만큼은 경쾌하던 네 손길을 떠올린다. 다른 건 다 서툴고 어설프면서도 칼질 하나만큼은 으쓱거리던 너. 엄청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딘가 정감이 가던, 동그란 눈을 가진 너. 자주 박자를 놓치고 음정도 엉망이곤 했지만 신나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요리를 하던 너.      


사람의 기억들이란, 사랑이 떠난 뒤에도 이렇듯 불쑥 찾아들어온다. 어쩌면 아까 낮에 사랑에 관한 단편집을 읽으며 잠이 들었던 까닭일까. 사랑은 몸이 기억하는 언어여서일까. 오랜만에 찾아온 기억들은, 쉬이, 떠나지 않는다.



다시저녁

     

어둠들이 다시 발목으로 밀려 올라온다. 불을 켜지 않는 저녁, 어두운 밤. 아니다, 유튜브에 올려진 방송들을 봤고, TV 예능을 봤고, 잠시 밖에 다녀왔고, 사진들을 보정했다. 화면을 통해 보이는 세상은, 뷰파인더로 보는 세상과는 또 다르다. 뷰파인더로는 쉽게 알 수 없었던 작은 흔들림마저, 대형 모니터에서는 보다 크고 선명하게 드러난다. 세상 속에서, 내가 바라보는 이 풍경들을 뷰파인더로 떼어서 보면, 세상은 다시 말을 걸어온다. 내가 걸었던 걸음, 내가 바라보았던 시선, 그리고 순간과 찰나의 움직임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편린들이, 말을 걸어온다.    


몸속을 떠도는 말들, 어둑해진 공기 중으로, 떠도는 문장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의 유해들을 밟고, 지나간 웃음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이 봄을 건너간다. 기억되지 않는 것들은, 그림자 너머, 유난히 시간이 느려지곤 했던 나무의 수관 어딘가에 흐르고 있을 것임을 알기에, 나는 여전히 너를 품고, 기억의 층계를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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