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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Apr 10. 2017

어느 봄날의 일기


#1.

4월의 거리는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사람들도 겨우내 둔탁했던 외투를 벗고, 조금 더 경쾌한 걸음을 하고 있었다. 유난히 길었던 겨울을 지나왔던 사람들에게는, 대기 중에 스미는 바람마저 가벼운, 이 봄을 닮아가는 것이 기꺼웠을 것이다. 어쩌면 조금 들뜨기도 했을 것이다. 꽃잎들이 주는 부드러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바삐 움직이던 발을 잠시 멈추고, 무성하게 피어난 그 꽃들에게 시선을 빼앗기기도 했을 것이다.

    

여리고 고운 벚꽃 사이로, 화사하게 피어난 꽃가지 위로, 푸른 하늘이 가벼이 내려앉는다. 그 나무 밑에 서본 이들은 안다, 겹겹이 피어난 이 꽃들이, 얼마나 사람을 매혹시키는지, 바람에 벚꽃잎이 흩날릴 때,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버리는지, 시간은 왜 멈추어 버리는지.

벚꽃잎은 우리를 순식간에 또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다. 그래서 이 꽃잎들 사이에 갇혀버리는 순간은, 늘 경이롭다.


어쩌면 저 꽃잎들은, 평생을 흙 속에 갇힌 채 지상에 붙박혀 있어야 하는 나무들의 소망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 어디로든 가고 싶었던 간절함을 담아, 꽃잎들을 공중으로 촘촘하게 뻗어 올린, 짙은 벚나무들. 그래서 봄이 되면, 저 나무들, 겹겹이 꽃가지를 피워 올리며 흐드러진 그 꽃잎들, 바람이 불 때마다 고운 꽃비가 되어 흩날렸던 것은 아닐까.


한없이 가벼이 내려앉은 꽃잎들 사이에서, 멈추어진 시간의 문들이,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투명한 결들을, 이 아름답고 순결한 순간들을 나는 차마 문장으로, 단어로, 표현할 수가, 조금이라도, 붙잡을 수가 없다. 늘 나의 언어는 한 박자씩 느리고, 부족하다.


그것이 또한 내가 사진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은 시간을 붙잡는 일. 나는 오늘도 사각의 프레임 안에 기꺼이 세상을 밀어 넣는다. 



#2.

비에 젖어 더 선명해진 나무들 사이에서, 이대로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은 잠시만 접어두어야 했다. 유난히 이 계절이면 가고 싶어지는 경호강과 섬진강의 이름을 가슴 한켠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한때 나는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몸 어딘가에 열이 오르곤 했었고, 이 열(熱)들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카메라를 어깨에 매고 나무와 나무들 사이를 몇 시간이고 걸어 다녔다. 이미 오랜 수령을 지녔을- 높고 무성한 가지와 굵은 나이테를 가진 나무와 나무들의 그늘 사이로 오래토록 걸어 다녔다. 햇살이 따가우면 따가운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골목과 골목 사이로, 담장 사이로, 혹은 유난히 꽃나무가 무성한 길과 길 사이로, 걷다가, 이따금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바라보다가, 그렇게 종일 걸어 다녔다.


어느 공원에서는 부모와 함께 온 어린 아이가 손을 내밀어 바람결에 날리는 꽃잎들을 따라 어린 걸음으로 종종이는 것을 보았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아이의 머리 위로, 동그랗고 조그만 어깨 위로 꽃잎들이 즐거이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또한 연인들은 꽃을 배경 삼아, 그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사랑하는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여전히 손길들은 서로의 어깨에서, 손에서, 허리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마주 잡은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서, 본다, 그리고 듣는다. 나를 보아요, 내게 웃어주세요, 사랑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봐주세요, 나를 당신에게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요. 그러면 나도 당신에게 기쁨이 될게요, 보이지 않는 목소리들로 서로를 향한, 기억의 지문을 남기는, 사랑의 언어들을 본다. 사랑하는 그 순간은, 그래서, 아름답다. 내 시선 안에 당신이, 그리고 당신의 시선 안에 내가 머무는, 그 순간들은, 때때로 지나치게 짧아서, 더 오래 기억되곤 한다.


그리고 또 보았다. 짧은 반팔을 입은 꼬맹이들은 뛰어갔고, 어린 소녀들이 곧잘 웃음을 터트리며, 재잘거리며, 꽃망울처럼 지나갔다. 어리고 가느다란 저 팔과 다리들, 곧게 세워진 허리들이 사랑스럽다. 아직은 세상 속에서, 슬픔보다는 기쁨에 조금 더 가깝기에. 꼬맹이들과 어린 소녀들에게 짧은 안녕을 보내며, 또 거리를 걷는다.


생각보다 거리는 소란스럽다. 문을 열어놓은 가게마다 커다랗게 들리는 음악 소리들은, 대부분 빠르고 활기차다. 몇몇의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기도 하며, 행선지가 없는 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유난히 작은 것들에 애정을 느끼는 까닭에, 허리를 낮추고 보아야 하는 길가의 들꽃이나, 화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꽃집 앞에 멈춰서기도 했다. 그러다,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가 아파트 정자에 앉아 세월을 바라보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고, 또 다른 공원벤치에서 주름이 깊은 할아버지가 굽은 허리로 홀로 앉아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어떤 학교 건물에서는 방금 9급 공무원 시험을 끝내고 쏟아져 나온 이들이, 저마다 전화기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보았다. 응, 엄마. 어떤 과목은 예상보다 쉬웠는데, 어떤 과목은 제법 어려웠어. 커다란 가방을 매고 돌아가는 이들의 걸음들이 점차 느려지는 것을 바라보며, 헐겁고 무릎이 튀어나온 옷을 입은, 시대의 뒷모습을 닮은 슬픈 청춘들, 그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지나쳐 나온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무거운 일이었다.

 

또 어느 모퉁이에서는 좌판을 펼쳐놓은 이가 짜장면 한 그릇에 허기를 채우는 것을 보았다. 지나다니는 이마저 몇 없는 길가에 늘어선 소쿠리마다 담겨있는 과일들이 주인을 찾지 못해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겨울이 아니었기에, 그래도 볕이 따뜻한 날이었기에, 거리에서의 점심이 마냥 차갑지 않을 것임에 조금은 다행이다 중얼거리며, 괜히 사과를 검은 비닐봉지에 한가득 사서 한참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



아마도 오늘 저녁이면 제법 발이 부어있으리라. 사람들의 가슴마다 꽃등이 하나 둘 켜지는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으니, 사람들의 몸속에서도 그렇게 많은 꽃들이 피어난다는 것을 알았으니, 온 종일 걸었던 그 길들을 마음에 계속 품고 다녔으니, 몸 어딘가가 부푸는 것쯤은 당연할 거다. 발목에서부터 명치 어디쯤까지 그 길들, 덩달아 내게도 꽃등 하나 달아놓았을 것이다. 그 수많은 꽃나무들, 내 몸 어딘가, 환하게 불 밝히며, 어딘가는 기쁘고 슬프기도 한 연한 꽃물을 들였을 것이다.


그래, 온 종일을 걷고 또 걷다 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순한 봄의 낯빛을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유쾌해지는 일이라,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발걸음마다 노랗고 옅은 분홍빛의 꽃가지들이 내려앉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혹은 여전히 아리고 매서운 날들 속에 놓여있는 그늘들을 지나와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봄은 늘 조금쯤은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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