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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Aug 09. 2017

문득, 여름날


하늘이 유난히도 푸르다. 유난히도 피곤한 날, 유난히도 어지러운 날. 그저 쉴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너는 2박 3일로 여행을 떠났다. 어깨엔 가벼운 가방을, 손에는 단단한 캐리어를 끌고 여행의 설렘으로 적당히 가벼워진 발걸음을 배웅하다가, 네가 떠나는 터미널, 낯선 여행지를 매달고 있는 버스를 타고 나도 떠나고 싶었다. 단단한 외피를 지닌 고속버스의 좌석에 전날의 피곤함과 소소한 기쁨들을 함께 누이다 깜빡 잠이 들기도 하는 시간. 목적지에 내려서 낯선 터미널을 지나오는 일. 그 낯선 공기를 몸속에 새겨 넣는 일. 낯선 곳에서 낯선 타자가 되는 일. 그 순간들을 너는 용기 있게 마주하고 오겠다고 했다.


포항과 울산, 부산- 동해안의 바닷길을 따라가겠다고도 했다. 그 다음 전주 한옥마을에서 느리고 여유로운 공기를 마시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오래간만에 한복을 입고 거닐다가 오겠다고도 했다. 여기서 그곳까지 멀어진 거리만큼, 네 가벼운 들뜸만큼이 바로 일상에서 멀어진 거리겠구나. 물리적 거리가 네게 만드는 심리적 해방감을 가만히 헤아려보는 것도 꽤나 좋구나, 네게 기분 좋은 위안이 깃들길 바라는 나의 마음만큼이나.

   

익숙한 일상 속에 익숙하지 않는 순간의 바람들을 담아놓는 일, 너의 낯선 발걸음이란. 

어쩌면 너는 떠나는 즉시 지겹게 느껴졌던 이 순간으로 돌아오고 싶을지도 모른다. 예약된 게스트하우스를 찾아들어가 잠시의 짐을 풀고 낯선 곳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는 것은. 혼자서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 메뉴판을 펼치고 그 속에 빼곡하게 박혀있는 외로움들을 골라서 주문한다는 것은. 

떠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외로움을 낱낱이 마주 대한다는 것. 너의 외로움들이, 너의 단단한 외피가 되기를, 바란다. 또한 나는,


너를 보내고, 나는, 자판 속에서도, 순간, 길을 잃는다. 모니터가 이렇게도 복잡하고 어지러웠던 것임이 새삼스럽다. 그래, 그랬구나. 이렇게나 많았구나, A4를 넘기다가,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다가, 화면 속에서 깜빡거리는 커서를 서둘러 따라가다가, 미로처럼 수많은 사이트 속에서, 이어폰 속 낮은 노래에 귀 기울이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창가, 블라인드 사이로 밀려오는 부드러운 저물녘의 햇살 속에서, 문득문득, 너는, 네 목소리는, 네 웃음들은, 이제 막 설레기 시작한 초여름을 닮은 네 사랑은, 그리고 무릎을 낮춰 고개를 숙이고 네게로 눈을 맞추는 나는.

 


그래, 그러자꾸나, 네가 돌아오는 날이면, 우선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네가 다녀왔던 이 계절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듣자꾸나. 그리고 네가 내 곁에 없던 순간에도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던 마음들도 가만히 놓아두고, 어느 날은 무더웠고, 어느 날은 흐렸으며, 어느 날은 여름답지 않게 서늘한 새벽도 있었음을, 가만가만히, 낮고 조용하고 작은 이야기들을 들어보자꾸나. 여기에서 저기까지, 그 사이에 놓여져 있던 우리의 생들이 천천히 겹쳐지는 순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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