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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종이 Feb 14. 2023

어서와, 김밥 지옥은 처음이지?

김밥을 쌀때 내 사랑을 확인해

 내가 처음 김밥을 싸던 때가 생각이 난다. 다 터지고 흐물흐물해서 제대로 썰지도 못했던 그 때. 난 평생 김밥은 못쌀 거라고 생각했다. 손쉽게 김밥을 뚝딱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이제는 내가 그러고 있다.


 남자친구와 소풍을 가기 위해 도전을 해본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실패를 했고, 결국에는 유부초밥으로 돌리곤 했었다. 근데 요즘에는 건강 식단을 위해 일주일에 3번 이상 김밥을 싼다. 역시 사람의 능력은 노력을 거듭하면서 생겨나는 것! 완전한 초고수님들처럼 뚝딱뚝딱 싸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이제는 나름 제대로 싸게 되었다. 대충 돌돌 말아도 흐물하지 않고 짱짱하게, 어쩔 때는 팔뚝만하게 왕김밥을 만들 때도 있다. 그것도 터지는 곳 없이!


 이렇게 김밥을 만들어 먹게 된 계기는 결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나서 30대가 된 남자친구와 나의 건강을 위해서였다. 특히 소아 당뇨로 아직까지는 티나지 않는 고생을 하는 남자친구를 위한 식단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김밥은 조금 특별하다.


 -특별한 점 몇가지-

1. 밥이 아주 극소량 들어간다.(어쩔땐 아예 없이 키토김밥으로 만든다.)

2. 야채와 단백질을 최대한 많이 들어가게 한다.

3. 밥에 간은 전혀 하지 않고 참기름만 넣어 섞는다.

4. 모든 재료에도 간을 하지 않고 계란에만 소금을 살짝 넣는다.

5. 밥은 절대 흰밥을 사용하지 않고 현미 혹은 잡곡밥이다.


 탄수화물이 쥐약인 병이 '당뇨'이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다. 각종 반찬들을 간 적게 해서 잡곡밥과 슴슴한 국을 구성한 건강 식단이면 참 좋겠지만, 그렇게 매일 저녁을 챙기기에는 퇴근 후 서로 힘이 부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조류인 김에 간을 거의 하지 않은 각종 채소들과 단백질, 그리고 혈당 조절을 위한 잡곡밥을 살짝 깔아 만드는 나만의 '김밥'은 당뇨 식단에 꽤 타당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밥을 싸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나' 때문에 더 하는 것도 있다. 희한하게 식판에 음식을 하나씩 담을 때도 그렇긴 하지만 김밥은 재료를 하나하나 준비해야 해서 그런지 당근을 채 썰면서, 볶으면서, 계란을 섞으면서, 부치면서, 쌈채소들을 씻으면서 내가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내가 하루종일 일에 치이고 금전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세상 살기 쉽지 않음을 느끼고 퇴근을 하지만, 하루를 버텨낸 나에게 부정적인 마음만 있지 않음을 확인시켜 준다고 해야 할까? 어떻게 보면 나는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할 때보다 내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때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침에는 바쁘다 보니 밥에 쌈채소, 계란, 집에있던 멸치볶음만 넣어 돌돌~ 나름 영양은 골고루 챙김!

 발렌타인 데이에도 초콜릿을 먹기 부담스러운 상황이니 나는 김밥 지옥을 개장했다. 아침부터 일찌감치 함께 김밥을 먹자며 싸서 배달했다. 김밥을 워낙 좋아하는 나에게는 건강한 식단+좋아하는 음식+사랑함을 느끼는 시간까지 여러모로 장점이 많은데 남자친구는 정말로 좋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내가 해주는 건 라면 한 끼도 좋아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고맙다며 하트를 날리지만 진심일지는..ㅎㅎ 


 아꽁아, 김밥 지옥은 우리가 결혼하고 나서도 이어지겠지? 어쩌면 또 다른 간단하고 건강한 식단으로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김밥 싸는 시간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여서 오랫동안 지속될 듯 해. 속재료는 건강한 것들로 자주 바꿔줄게! 내 사랑 듬뿍 받고, 김밥 싼 뒤에 난리통이 되는 부엌 정리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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