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기억하다. 나누다.
엄마아빠는 1960년대에 장위동으로 이사 와 1980년대에 나를 낳았다. 1980년대 장위동은 내가 알고 있는 세계의 전부였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은 대여섯 살. 막다른 집이었던 우리집에서 대문을 열면 보이던 골목길까지. 세계는 자라며 조금씩 커졌다. 나 빼고 모두가 다니는 것 같아 궁금하고 부러워 견딜 수 없었던 유치원이 있던 옆 골목들로. 장위초등학교에 입학하고는 늘어선 단독주택들 너머로 이어지고 갈라지던 골목들 끝에 우뚝 서 있던 학교까지. 조금 더 지나서는 학교와 이어진 장위시장의 상가건물들까지 커졌지만 그 역시 결국은 단독주택들 사이사이를 작은 가게들이 채우고 골목들이 끝없이 이어지던, 그러니까 단독주택들과 골목들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우리집도 장위동을 채우고 있는 단독주택들 중 하나였다. 어른 키높이의 시멘트 담벼락 끝에 지붕을 얹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빽빽한 나무들에 둘러싸인 단층집. 붉은 타일을 두른 벽면에 절반은 기와지붕, 절반은 널찍한 옥상이 있었다. 거실을 가운데 두고 방 두 개와 뒤쪽에 골방, 욕실과 부엌이 있었고 부엌 뒷문으로 장독대가 있는 뒷마당으로 이어졌다. 우리 골목을 채우고 있었던 아홉 세대가 거의 비슷한 구조였다. 담벼락 끝에 지붕을 얹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무가 있는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들. 다른 골목의 집들도 그 골목을 따라 갈라지던 다른 골목들의 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모두가 단독주택이라 해도 사실은 다 같은 단독주택이 아님을, 더 작거나 더 큰 집도 있고 전세나 사글세로 더부살이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바로 그것이 부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임을 언제 알아차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골목을 함께 뛰어다니며 놀던 소꿉친구들의 집을 오가면서부터였을까 아니면 심부름하다 나도 모르게 다른 집들의 거실이며 안방 같은 사적인 공간에서 각기 다른 생활방식과 수준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부터였을까.
우리집은 붉은 벽돌을 두른 그럴듯한 양옥이었지만 거실은 한옥의 툇마루처럼 나무로 깐 바닥이 전부였다. 겨울에는 얼음장같이 추운 거실 양옆으로 붙은 두 개의 방 아궁이에 연탄으로 불을 땠다. 안방에는 엄마아빠가 맞은편 큰방에는 우리 다섯 자매가 자고 먹고 학교 갈 준비를 하고 돌아와 공부도 하고 모여앉아 TV도 봤다. 마당에는 진달래, 철쭉, 라일락, 사철나무 등이 빽빽이 자라 옥상을 덮을 정도였다. 화장실은 마당 끝에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 있었다. 알루미늄 문짝을 열면 시멘트바닥에 있는 좌식변기가 어린 눈에도 너무나 싫었다. 철마다 꽃이 피면 꽃향기를 맡으며 언니들과 사진도 찍고 눈이 내리면 볼이 얼 때까지 눈사람을 만들며 즐거워 했지만 새벽에도 연탄을 갈러 나가던 엄마의 옷자락 소리는 늘 서늘했다. 그 소리에 잠이 깨 화장실이 가고 싶어도 추위에 떨며 어둠에 잠긴 무서운 나무들을 지나 냄새나는 좌변기에 앉는 게 죽어도 싫어서 꾹 참고 버티곤 했다.
그러나 골목 친구네 집은 우리집처럼 다 쓴 연탄재를 대문 옆에 세워뒀어도 마룻바닥이 따뜻해 나를 놀라게 했다. 골목 어귀 큰 집에선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잔디밭에 돌로 만든 계단을 올라가 현관문을 연 순간 반짝반짝 윤이 나던 대리석 바닥의 거실에 화려한 양탄자가 깔려있어 넋을 잃고 바라보았더랬다. 같으면서도 다른 단독주택들 속에서 자라면서 나는 생활 수준의 차이를 어렴풋이 알아차렸고 그런 차이들 속에도 나란히 또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 역시 어렴풋이 받아들였다.
차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아찔한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유년기의 끝 무렵이었다. 등하굣길 지나치며 늘 궁금해했던 집의 육중한 차고문이 열려 있었다. 그 길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던 담벼락 너머로 솟은 나무들은 언제나 아름답게 다듬어져 있었다. 예전에는 국회의원의 집이었고 다음으론 사업가가 그 으리으리한 집에 살고 있다고 아이들 사이에서 소문이 무성했지만 정작 그 집 내부를 본 친구들은 없었다. 차고문 너머 그 집은 모든 게 너무나 아름다워 충격적이었다. 매끈한 검은색 몸체가 반짝거리는 외제 스포츠카가 자리잡은 차고 옆으로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그 끝에 나무들이 반대편 담벼락이 보이지 않도록 정원을 두르고 있었다. 호기심에 차서 잔디밭 너머 그림같이 서 있던 이층 양옥주택을 자세히 살펴보려는데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입구 계단 앞에 검은색 사냥개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검은색 스포츠카만큼이나 매끈하고 날렵한 그 개가 너무 무서워 얼어붙는 순간 차고에 있던 누군가가 개를 달랬고 나는 그 대문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그 집이 내가 본 가장 화려한 집이었다면 그 무렵 가게 된 같은 반 친구네 집은 내가 본 가장 초라한 집이었다. 친구의 초대에 기뻐하며 열심히 따라가 마주한 그 집 역시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단독주택들이 늘어선 골목들을 지나 월곡동 산동네로 이어지는 골목은 점점 좁아져 미로처럼 이어졌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점점 작아져 판잣집들로 바뀌었다. 친구네는 판잣집들로 이어진 골목도 끝나 드문드문 판잣집이 서 있는 산비탈 중턱이었다. 친구가 해맑은 얼굴로 나를 잡아끌며 문을 열자 집안 살림이 한눈에 다 보이는 한 칸짜리 방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얇은 문틈 사이 산등성을 쳐다보며 신나게 떠들었다. 밤이면 산이 어두워 무섭고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 게 싫다는 이야기에 나도 밤이 무서워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가기 싫다며 맞장구쳤다. 정말 무섭겠다고 친구를 걱정했더랬다.
나는 친구의 집을 마주한 순간에도 이후 친구와 헤어져 돌아와서도 누구에게도 그 집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으리으리한 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찔한 빈부의 격차를 감히 비교할 수도 없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우리집을 비롯해 동네를 채우고 있는 모든 집들이 사실은 각각 위치와 크기 그리고 외관과 내부로 삶을 그대로 전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도 그것으로 감히 그들 삶의 무게를 잴 수 없다는 것도 직감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렇다. 1980년대 장위석관월곡은 그렇게 아찔한 빈부격차가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하던 지역이었다. 10평 남짓 작은 단독주택부터 100평에서 500평에 이르는 거대한 단독주택들까지 우리동네는 이미 1960년대부터 개발된 단독주택들 사이사이를 얼기설기 지은 집들이 채우고 다시 또 그 둘레를 둘러싸고 산중턱까지 판잣집들이 채우고 있었다. 세대수로 치자면 으리으리한 단독주택들보다 다닥다닥 붙은 작은 주택들과 판잣집들의 인구가 더욱 많았다. 이것이 동네 어른들이 “이 동네는 야성野聲이 있다”며 선거에서 반드시 야권이 이긴다고 굳게 믿던 이유이기도 했다.
*전후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주택공사의 사업으로 시작된 1958년 재건주택 건축을 시작으로 1958년 부흥부택, 1962년, 1964년 국민주택이 장위동 일대에 들어섰고 1962년부터 1966년까지는 동방생명의 민간택지분양으로 대규모의 단독주택들이 들어서 성북구에서는 성북동과 비견되는 부자동네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였다.
참고,『장위동, 도시주거변천의 파노라마』, 서울역사박물관, 2020.*
그 말은 뇌리에 박혔지만 나는 아직 정치라는 단어도 몰랐기에 그 말의 뜻도 당연히 몰랐다. 다만 그 집들이 늘어선 골목들을 누비고 다녔을 뿐. 아직은 아스팔트 아닌 보도블럭과 흙바닥이었던 골목길에서 소꿉놀이하며 친구들을 사귀었다. 언니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얼음땡, 다방구, 술래잡기, 고무줄을 하면 깍두기로 끼어 놀이를 배웠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뛰어다니다 무리가 제법 커지면 앞장 선 언니오빠들을 따라 내가 알던 세계의 끝으로 모험을 떠나기도 했다. 우리는 엄마아빠가 사주지 않던 불량식품을 사러 장위시장으로 원정을 갔다. 어른들이 위험하니 가면 안 된다고 단속하던 돌산들을 궁금해하며 탐험하러 나서기도 했다. 특히나 우리 꼬맹이들 사이에서 돌산이라 불리던 동네의 모든 산들은 골목이라는 세계 너머에 있는, 호기심과 두려움을 자아내던 미지의 그 무엇이었다.
친구네가 있던 판잣집들이 중턱까지 이어지던 높은 돌산은 꼭대기에 애기무덤이 있었고 아기 귀신이 나타난다고 했다. 이따금 밤늦게까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무서운 일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골목이 끝나고 차가 지나다니던 큰 길 양옆으로 솟은 작은 돌산들은 둘다 중턱에 이름 모를 무덤이 있었다. 6.25때 죽은 누군가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원한을 갖고 목을 맨 누군가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 끝에 이어진 큰 도로 너머의 돌산은 끝까지 올라가면 정상에 철조망이 있다고 했다. 밤마다 신음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그 철조망 아래 핏자국을 보았노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언니오빠들과 함께라면 어디든 무섭지 않았지만 가장 먼 큰 도로 너머의 돌산은 언니오빠들도 귓속말로 전하기만 할 뿐 한 번도 끝까지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늘 궁금하면서도 무서웠다. 그리고 딱 한 번 다함께 큰맘 먹고 가장 먼 돌산의 정상까지 갔던 날, 우리는 정상 근처에서 진짜 철조망을 보았다. 그리고 새카맣게 칠한 얼굴에 군복을 입고 무장한 군인과 마주치는 순간 모두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 내려왔다. 어른들은 그것을 정보부산이라 부르곤 했다. 그곳이 핵심대공업무를 맡았던 중앙정보부 대공분소로 고문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억울한 일을 만들던 곳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중앙정보부는 천장산에 1962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68년 건물을 완공하였으며 1972년 핵심대공업무를 천장산에 있는 중앙정보부에 이관하였고 1995년에야 내곡동으로 청사를 옮겼다.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중앙정보부 주변은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낙후된 동시에 과거의 풍경이 개발된 서울의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편으로 여겨진다.
참고, 중앙정보부 본청, 성북마을아카이브홈페이지, 성북문화원, 2020*
그러나 무장한 군인과 눈을 마주쳤던 그 순간의 긴장감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이따금 불쑥불쑥 되살아났다. 하굣길 매캐하던 최루탄 냄새에. 골목 밖으로 나다니지 말라던 어른들의 경고에. 혼자 숨어 책을 읽던 장독대에서도 보이는 뿌연 연기들과 불길하던 사이렌 소리에. 전두환 정권이 노태우 정권으로 바뀌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월곡동 산동네 판잣집들이 사라지고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었다. 큰 길 양옆의 돌산들은 깎여나가 하나는 월곡중학교 하나는 아파트가 되었고 큰 도로에는 거대한 다리들이 놓이는 공사가 이어졌다. 막연한 불안과 희망이 늘 함께했다. 주택들과 골목들만으로 이루어졌던 나의 세계는 그렇게 바뀌고 있었다.
* 이 프로젝트는 리서치를 기반으로 생애사와 드로잉을 통해 성북의 장위동 일대 지역의 미시사를 기록한 작업입니다. 2021년 성북문화재단 예술순환로 성북오픈리서치랩의 소주제연구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