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공사공사, 공사가 일상이던 서울변두리

살다. 기억하다. 나누다.

by 문성 moon song

1990년대 나는 장위, 석관, 월곡을 오가며 10대를 보냈다. 장위동 한복판에 있는 장위초등학교에서 고학년을 보내고 상월곡역 옆에 자리한 월곡중학교에서 3년, 다음에는 석계역 뒤쪽에 자리한 석관고등학교에서 3년을 보내고 곧 밀레니얼이었다. 장위동과 월곡동의 경계에 있던 우리집에서 등하교를 하는 것부터가 장석월을 오가는 셈이었기에 학교생활과 함께 자연스레 나의 일상은 장위동에서 월곡동으로 또 석관동으로 확장되었다. 그때의 장석월은 지나는 곳마다 공사를 하고 있었다. 골목이든 도로든 도로변 건물이든 오가는 길 어딘가는 늘 헐리고 새롭게 지어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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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90년대 장위동 교육환경의 가장 큰 특징은 행정적으로 장위동 내에 소재한 학교의 수가 매우 적었다는 점이다. (중략) 장위동은 행정적으로 학교가 별로 없었으며 고등학교가 부재하였기 때문에 외부의 교육환경에 의존하였다. 장위동의 경계선, (중략) 장위동 밖으로 통학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은 필연적으로 통학거리의 부담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장위동, 도시주거 변천의 파노라마, 서울역사박물관*


공사는 우리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빠는 내가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 엄마가 밤마다 연탄불 가는 걸 끝내겠다는 말과 함께. 집보다 큰 마당에 철마다 꽃이 피던 나무를 모두 베고 지층 3세대, 1층 2세대, 2층은 옥탑방을 포함한 다세대주택을 지어 올리는 동안 우리 가족은 이미 비슷하게 지어진 바로 뒷집 2층에 전세를 들었다. 동네의 소위 집장사라 부르던 이에게 공사를 맡기고 아빠도 매일같이 공사장을 찾았지만 어린 내 눈에도 주먹구구식으로 만드는 과정에 종종 문제가 발생했다. 비용은 점점 뛰었고 그때마다 아빠는 골치를 썩었다. 그 당시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다고 했다.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는 몰라도 아빠가 부동산에도 돈을 불리는데에도 잼병인 것은 분명했다. 모두가 공사와 부동산으로 돈을 불리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던 그 시절에. 우리집은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


*1990년대 들어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건물이 다수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중략) 이는 다세대, 다가구 용도의 주택이 1990년대 이후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즉 대상지의 구조형식 중 지상2층 이하로 된 저층의 단독주택의 연와조구조에서 지상6층규모까지도 가는 다세대, 다가구주택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서울시 장위동 국민주택 단지의 변화특성에 관한 연구, 권훈, 김경연, 전병권, <대한건축학회논문집> 제27권 제9호 2011년 9월호*


나는 전후 사정을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눈치챘다. 당장은 우리집이 다른 이들의 집처럼 바뀌는 것이 좋았다. 추억이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을 다 베어버리는 게 속상했지만. 그래놓고는 흙바닥에 시멘트를 바르고 다시 한쪽에 화단을 만들고 빈약한 나무 몇 그루를 심는 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보일러에 늘 따뜻한 집안, 따뜻한 물을 쓸 수 있는 입식 화장실과 샤워기가 좋았다. 무엇보다 안방 외에도 옥탑방까지 더하면 방이 3개나 더 생겨서 넷째언니와 둘이서만 방을 쓸 수 있다는 게 너무나 기뻤다. 마침 큰 언니는 집을 짓는 그 시기에 결혼해 우리집 1층에 신혼살림을 차렸고 나머지 다른 세대에도 사람들이 들어왔다.


우리 골목 9개의 단독주택 중 두 집을 빼놓고 우리집을 포함한 일곱 군데가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세대주택을 지었다. 모두가 마당의 나무를 베어내고 집의 크기도 늘리고 층도 늘렸다. 코딱지만 한 화단 아니면 그마저도 없애고 바닥을 시멘트로 바르고 붉은 벽돌이나 인조화강암으로 외벽을 마감한 비슷한 모습이었다. 반지하부터 층마다 세를 받았고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차도 늘어나 골목을 채우기 시작했다. 우리 골목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골목들도 많은 집들이 다세대주택, 맨션이나 빌라같은 이름의 다가구주택으로 바뀌었다. 결국 끝까지 단독주택을 고수하거나 새로이 집을 지을 필요가 없었던 으리으리한 단독주택들만이 원래의 모습대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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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다세대주택으로 바뀌기 직전의 장위동골목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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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 다세대주택으로 바뀌고 입주민들의 자동차로 가득 찬 장위동골목 풍경


골목 안에서 그렇게 한 집 걸러 하나꼴로 경쟁하듯 공사판이 되었다면 골목 너머는 아예 본격적인 대규모 공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골목끝 도로 너머 월곡동 산동네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작은 집들과 그 위로 산비탈까지 이어지던 판잣집들은 어느 순간 한꺼번에 사라지고 아파트단지 공사가 시작됐다. 도로를 따라 내려간 큰 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사중이었다. 내부순환도로가 들어서는 공사에 지하철 6호선 공사까지 더해져 본격적인 공사판이 시작되었다. 도로에 철판이 깔리고 그 위로 가림막과 인부들, 차들이 늘 뒤엉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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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종암동 일대 내부순환로 공사현장, 성북마을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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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종암로 근처 내부순환로 공사현장, 서울특별시 아카이브


그렇게 모든 게 바뀌고 있었지만 나에겐 매일같이 달라지는 풍경조차 느리게만 여겨지는 서울의 변두리일 뿐이었다. 어쩌면 내가 자라는 것보다 장석월이 바뀌는 속도가 더디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장위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이곳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월곡중학교를 다니며 얼마나 서울의 변두리인지를 실감했고 석관고등학교를 다니면서는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어 졸업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초중고를 다니는 동안 집보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 시간엔 늘 학교담장 안에만 갇혀 있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장위초등학교는 걸어서 20여 분 정도였다면 월곡중학교는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100미터 달리기도 불가능한 작은 운동장에 건물 하나, 각 학년 10학급이 전부였다. 그것도 작은 돌산을 깎아 만든 것이었니 꽤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중학교는 새로운 세계였다. 성적과 인간관계라는 날실과 씨실로 엮인. 월곡동, 석관동에 사는 친구들을 사귀며 무심히 지나치던 월곡동의 도로가 친구네 집으로 향하던 길로, 석관동의 상점들이 헤어지기 전 함께 수다를 떠는 친숙한 곳으로 바뀌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군것질을 하러, 서점에 책을 사러, 음반가게에서 카세트테이프를 사러, 장위시장을 찾았다. 하지만 우리는 기회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밖으로 나갔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끝나거나 방학이 시작되면 돈을 모아 시내로 나갔다. 돈암동 거리를 쏘다니며 아트박스나 모닝글로리같은 팬시용품점, 악세사리가게, 옷가게들을 구경하고 늘어선 노점상에서 꼬치를 사먹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종로3가로 나가 종로서적이나 영풍문고, 교보문고를 돌아다니며 최신음반이나 책, 잡지를 구경하는 건 허락을 받아야 하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돈암동만 하더라도 마을버스를 타고 장위시장 끝자락 국민은행 사거리에서 돈암동을 지나는 버스로 갈아타거나 미아삼거리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다시 4호선으로 지하철로 갈아타야 했다. 종로3가는 차가 막히기라도 하면 오가는 길만 두 시간 넘게 걸리기도 했다. 이곳은 그야말로 맘먹고 오가는 시간을 들여야 할 정도로 교통이 좋지 않았다.

나는 석관고등학교로 배정받았다. 중학교, 초등학교 친구들 대부분이 함께였다. 석관고는 석관동 끝자락에 있었기에 마을버스를 타고 석계역에서 내려 1호선 철로를 따라 난 골목길을 지나 학교까지 걸어가야 했다. 골목길에는 울창한 가로수와 오래된 석탄공장의 건물들이 학교담장과 맞닿아있었고 그 담장이 내가 10대 후반을 보낸 일상의 경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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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 담장 너머 석탄공장과 1호선철로가 지나던 석관고등학교 내정


본격적으로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자 학교는 집 아닌 집이 되었다. 어스름한 새벽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도착해 별이 뜬 밤하늘을 보며 돌아가기까지 하루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냈다. 장위, 석관, 월곡에 더해 이문, 휘경, 월계 등 다양한 곳에서 온 친구들과 삼시 세끼 함께하며 가까워졌다. 진로고민, 집안 사정까지도 공유하면서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다. 더불어 석관고등학교는 석탄고, 똥통학교, 석관대학교라는 다양한 별명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다행히 내가 들어가기 직전 문을 닫았지만 강원도에서 실어온 석탄을 가공하던 공장이 학교옆에 남아 있었다. 교복 셔츠깃이 금세 까매져 매일 빨아야했다는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인문계고임에도 늘 학교순위 꼴찌를 다투고 대학진학률도 낮다고 했다. 고등학생이 대학생마냥 지각을 밥먹듯 하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자유로운 학교라는 비아냥 반 자조 반의 농담도 심심치 않게 듣곤 했다.

이미 초등학교를 거치며 우리집이 잘사는 편이 아님을 알았고 중학교를 졸업하며 늘 불안정한 집안 상황에 부모님이 우리를 돌보는 것이 불가능한 시기였다. 언니들을 보며 나 자신을 돌보는 유일한 방법은 좋은 대학에 가서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는 것임을 느꼈고 나 역시 공부에 매달렸다. 석관고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숨 막히는 집을 벗어나 공부에 몰두하게 해주었지만 당연하게도 학교는 집이 될 수 없었다. 나뿐 아니라 모두가 대학입시라는 허들 앞에 늘 초조해했고 늘 시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야자 직전의 저녁시간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 구석의 매점, 학교 앞 서점, 한적한 석관동 골목길 어귀를 서성이며 시간을 보냈다.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함께 시내로 나가 거리를 쏘다니곤 했다. 돈암동, 경희대 앞, 종로3가, 광화문, 명동까지도.

새로운 무언가를 경험하는 것에 늘 목이 말라 있었다. 아직은 종로가 가장 번화한 서울의 중심가라는 타이틀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종로대로 양옆으로 높은 빌딩들. 아래로 늘어선 갖가지 음식들을 팔던 노점상들. 사람들이 북적이는 영화관의 반짝이는 조명들. 도심 한복판의 화려한 풍경이 주는 황홀함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격렬한 대치가 주는 충격도 거기 있었다. 서울로 상경해 집회를 하던 농민들, 단속 호루라기에 다급히 도망치던 노점상들. 전경과 대학생들이 뒤엉킨 도로 한복판. 황홀함과 충격 뒤의 알 수 없는 복잡함을 이해하고 싶었다.

노태우 정권에서 김영삼 정권으로 다시 김대중 정권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등 굵직한 대형사고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IMF 구제금융 사태를 정점으로 TV도 신문도 우리나라가 당장이라도 망할 것 같이 떠들어댔지만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안팎으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상황 속에서 나는 학교 담장 너머, 장석월을 벗어나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서울의 도심과 부도심, 주거지가 분명히 나뉘던 시기였다. 석관고 인근 석계역은 1호선과 경춘선, 성북역으로 이어지는 기차에 구리를 비롯한 서울 외곽으로 나가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교통의 결절점이었다. 지하철 노선과 버스정류장이 교차하던 돈암동, 경희대 앞은 대학가 주변으로 형성된 부도심이었고 종로3가와 명동은 서울의 중심가였다. 나와 친구들은 부도심 주변부의 주거지, 장위동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하나둘 부모님의 이사와 함께 이곳을 떠났다. 누군가는 우리집처럼 다세대주택을 짓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아파트로 옮겨갔다. 노원구로, 일산으로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가 돌아와 보면 장석월은 그야말로 서울의 변두리였다. 그 와중에 나 역시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졸업과 함께 장석월을 벗어날 순간이.


* 이 프로젝트는 리서치를 기반으로 생애사와 드로잉을 통해 성북의 장위동 일대 지역의 미시사를 기록한 작업입니다. 2021년 성북문화재단 예술순환로 성북오픈리서치랩의 소주제연구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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