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늘어선 공공시설과 프랜차이즈

살다. 기억하다. 나누다.

by 문성 moon song

2000년대의 장위, 석관, 월곡은 나서기 위해 돌아오는 곳이었다. 내가 2000년대 장석월에서 보낸 시간을 다 합한다 해도 다른 곳을 떠돌며 보낸 시간의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집은 지친 몸을 끌고 돌아와 곯아떨어졌다가 다시 길을 나서는 곳이었다. 장위동에서 장을 보거나 은행이나 동사무소 같은 곳에서 일 처리를 하는 걸 제외하곤 이따금 석관동에서 중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그렇게 무심히 지나는 동안에도 장위동과 석관동은 90년대 후반 그대로였다. 반면 월곡동 한쪽엔 도서관을 필두로 공공시설들이 다른 한쪽에는 아파트와 상가, 주상복합빌딩들이 들어서 풍경을 바꾸어놓았다. 2000년대 후반쯤엔 이미 월곡역을 중심으로 나를 포함한 장석월 사람들의 생활반경이 바뀌고 있었다.

나는 관악에 있는 대학에 입학해 2000년대 초반을 보냈다. 우리동네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석계역으로 가서 1호선, 4호선, 2호선, 다시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 먼 곳이었다. 6호선이 개통하고는 마을버스 대신 곧바로 집 앞 6호선을 탔지만 역시 4호선, 2호선,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매일 1시간 반에서 2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오가는 건 단순히 시간만 쓰는 게 아니라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과 부대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남들보다 일찍 나서고 늦게 돌아와야 했기에 그만큼 동네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왕복 서너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나면 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지쳐있었다.

KakaoTalk_20211009_210426757_07.jpg
KakaoTalk_20211009_210426757_27.jpg
이른 아침 장위동 골목길 풍경과 늦은 밤 장위동 골목길 풍경

조금 익숙해지고 나서는 더더욱 동네에 있는 시간이 줄었다. 학교수업만이 아니라 학회, 학생회, 다양한 모임들이 쏟아졌고 나는 닥치는 대로 새로운 경험에 몰두했다. 주말에도 벌어지는 일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일주일에 일곱 번 넘게 학교에 갈 정도로 대책 없이 날뛰었다. 집에 돌아오면 지쳐 나가떨어져 죽은 듯이 자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고 미친 사람처럼 뛰쳐나가기 일쑤였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지하철역까지, 밤늦게 다시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오가던 그 거리가 아마도 내가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돌아올 수 있는 막차 시간을 넘겨 동기들이나 선배들 기숙사, 하숙집, 자취방에서 신세를 지는 일도 허다했다. 방학에는 아예 기숙사를 빌려서 지내기도 했다.

나는 친구들, 선후배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우리 동네” 그리고 나의 “우리 동네”가 꽤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들 대부분은 지방 출신이었고 경남, 경북, 전남, 충청, 강원 등 출신지도 제각기 달랐다. 그들은 같은 서울임에도 등하교에 서너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그렇게 먼 거리를 매일 오가는 나를 비롯한 서울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중고등학교부터 나가 놀던 종로나 명동 같은 도심을 친근하게 이야기했더니 서울이 다 너희 동네냐며 놀리기도 했다. 교외로 엠티를 갔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서울의 야경을 반가워하자 오히려 어지럽고 복잡해 싫다고 했다.


서울이 타지인 이들의 눈을 통해서 본 장석월은 수도 서울의 일부이자 천만이 넘는 인구가 사는 대도시의 주변부 주거지였다. 나는 우리 동네를 농담 반 진담 반 서울 촌구석이라 불렀지만 그들에겐 지하철역과 주민센터, 마트같은 각종 편의시설이 코앞에 있는 번화한 동네였다. 우리 동네와 같은 주거지와 돈암동과 경희대앞과 같은 부도심, 종로3가나 명동과 같은 도심이 나에겐 상황에 따라 오가는 곳들이자 그것들이 모인 하나의 집합체가 서울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서울이라도 각 지역이 전혀 다른 곳이었고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굳이 그 경계를 넘나드는 게 불필요한 일이었다. 나에겐 우리동네를 포함해 서울이 고향의 동의어였지만 그들에게는 서울 전체가 고향의 반대말이었다.

한편으론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서울의 다른 주거지들과 우리 동네가 꽤 다르다는 것도 실감했다. 대학을 다니는 사이 집안 사정은 더더욱 악화됐고 나는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서 학과 사무실, 중개업소의 소개를 받아 과외를 이어나갔다. 졸업할 즈음에는 강남, 목동, 노원같이 교육열이 높고 집값이 비싸다는 아파트단지들뿐만 아니라 서울의 거의 모든 구를 섭렵할 지경이었다. 서울의 다른 주거지들과 비교하면 장석월은 주변부 주거지인 다른 동네들처럼 아파트가 많지 않았다. 지하철역이 있는 다른 동네들처럼 상권이 발달하지도 않고 유동인구도 많지 않았다. 요컨대 장석월은 지방과 비교한다면 서울임에는 분명했지만 서울 내에서 비교한다면 서울답지 않은 곳인 것도 분명했다.

주말이나 연휴 혹은 명절이 되어서야 밀린 잠을 몰아서 자고 일어나 시장에 가는 엄마를 따라나서거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 친구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장위동과 석관동을 구심점으로 모였다. 예전에는 분식집이나 패스트푸드점에 모였다면 이제는 당구장, 보드게임장, 술집이나 노래방에서 만난다는 점이 달랐을 뿐. 수다를 떨다 늦어지면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부터 바래다주며 산책하듯 동네를 돌곤 했다. 그렇게 오가던 장위동과 석관동의 풍경은 늘 그대로인 듯했다.


휴학과 복학, 복수전공으로 뒤늦은 졸업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서울 곳곳을 떠돌았다. 학교 주변, 아르바이트하던 곳들 주변 마음에 드는 공간을 찾아다녔고 심지어는 틈틈이 돈을 모아 지방으로 해외로 여행을 떠났다. 내가 어디에도 맞지 않는 것 같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꾸만 새로운 곳으로 떠나 나에게 맞는 공간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 헤매고 다녀도 꼭 맞는 공간을 찾을 수는 없었다.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도 잠시. 곧 다시 확인하곤 했다. 나는 중고등학교시절처럼 이곳에 속한 채 나를 맞춰가며 지낼 수는 없었다.

집을 구하고 월급을 모아 대출을 갚아나가는 삶, 공간을 꾸미고 손님들을 맞이하며 대출을 갚아나가는 삶, 떠나고 돌아오길 반복하며 마주하는 공간마다 그 공간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삶의 방식을 고려해보다가도 무엇도 맞지 않는다고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느끼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문제인 걸까 자문하다가 맞지 않는다면 그 간극을 인정하자고 마음먹었다. 여기든 어디든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의 공간을 기반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차라리 다양한 공간들을 유영하듯 살아가겠다고.

공간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오히려 내 마음 가는 대로 오가며 시시때때로 머무를 공간을 선택하게 되었다. 장석월의 공간들도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집에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던 성북정보도서관은 책만 대출하는 곳이 아니라 혼자 사색할 수 있는 좋은 작업실이 되었다.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며 공공도서관의 존재가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도서관 주변 주민들의 삶도 좌우할 수 있음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내부순환로 너머 성북구립도서관전경_성북구청사진.jpg 내부순환로 너머로 보이는 성북정보도서관의 모습, 주위를 둘러싼 오래된 주거지와 키스트(KIEST)의 과학자아파트, 도서관 너머 천장산의 모습도 보인다. 성북마을아카이브제공

성북정보도서관이 있는 천장산 초입은 내부순환로가 새기기도 전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동네였다. 나 역시 2002년 개관한 도서관을 구경하러 왔다가 어린 시절 산정상에서 군인을 보고 도망친 이후 처음으로 길 건너 그 동네에 왔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였으니까. 도로변에 있던 가게들은 손님이 끊겨 거의 다 주유소나 정비소, 공장들로 바뀌었다. 그 뒷길로 들어서면 낡고 오래된 주택들이 늘어서 도서관까지 골목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오래전 시간이 멈춘 듯보였다. 그러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그 좁은 골목들을 오가며 활기를 불어넣었음을 알았다.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골목을 채웠고 주변에는 어느새 슈퍼와 분식점, 카페와 식당들이 사람들을 끌고 있었다.

성북구립도서관_성북구청사진.jpg 오래된 주택가에 자리한 성북정보도서관, 뒤로 천장산이 보인다. 성북구청제공, 성북마을아카이브

나는 도서관뿐만 아니라 새롭게 생기기 시작한 장석월의 다른 공공시설들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도서관 뒷문에서 이어지는 천장산의 산책로를 비롯해 월곡동 애기능터공원, 월곡천 등 동네 산책로를 걸었다. 월곡동 주민센터 강좌에서 요가를 배우며 마음을 다스리는 연습을 했고 장위동 청소년수련관에서 수영을 배우며 물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다. 상월곡역 앞에 개관한 실버복지센터 그리고 장위초등학교에 생긴 수영장에 엄마를 데려다주었다. 엄마는 큰언니가 우리집 아랫층에서 나가고 조카들도 초등학교를 다니며 모두가 자신의 품을 떠난 걸 외로워하던 참이었다. 노래와 한국무용, 아쿠아로빅과 수영을 배우며 엄마는 웃음을 되찾기 시작했다.

20210509_175126.jpg
KakaoTalk_20211009_210924349_16.jpg

공공시설들이 들어서는 한편으론 월곡동을 중심으로 아파트와 대형마트, 프랜차이즈 상점들도 들어서고 있었다. 2003년, 월곡동 판자집들을 밀고 완성된 동아에코빌 아파트에 사람들이 입주하는 걸 시작으로 나머지 능선에 두산위브, 삼성래미안, 푸르지오아파트가 세워졌다. 동아아파트 앞에서 월곡역 동덕여대 앞까지 오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길을 따라 빠리바게트, 던킨도너츠, 베스킨라빈스같은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들어섰다. 큰언니네가 동아아파트로 이사하고 이따금 조카들을 챙기러 아파트를 드나들며 나 역시 아파트에서 상점들을 거쳐 지하철역으로 이어지는 생활의 편리함을 피부로 느꼈다.

동아아파트는 우리집과 도로를 마주 두고 있었기에 상월곡역까지 5분도 걸리지 않았고 아파트 상가 마트를 시작으로 월곡역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내려가며 군것질에 옷과 악세사리 구경까지 할 수 있었다. 장위시장의 압도적 크기에 비교할 순 없었지만 월곡역 주변으로도 골목형 시장이 있었다. 새롭게 생긴 다양한 상점들도 있는 데다 월곡역과 이어지는 위치 덕분에 굳이 한참을 걸어 장위시장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나는 혼자서 차를 마시거나 쇼핑을 할 때에도 월곡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낡고 불편한 장위나 석관보다는 깔끔한 월곡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생계를 이어나가느라 여전히 장석월을 나섰다가 지쳐 돌아오길 반복하고 있었기에 동네에서 조금 더 편안한 곳으로 발길이 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도심 한복판 서울광장에서 2002년 월드컵 경기들을 응원했고 故노무현대통령의 지지자로 선거운동을 하고 탄핵반대 집회에 참여했다. 미국산 쇠고기수입 반대 촛불집회에 참여해 광화문 대로에서 명박산성에 둘러싸이기도 했고 노무현대통령의 노제에 참여하기도 했다. 대학에서도 졸업을 하고도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데 힘을 보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사람들과 함께 거리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정권의 변화와 자본의 논리에 그 방향이 순식간에 바뀌는 것을 무기력 속에 지켜보아야 했다. 장석월은 그 거대한 흐름과 연관이 없는 변두리인 듯 여겨졌지만 사실은 장석월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5년 장위동은 이명박 서울시장이 발표한 서울뉴타운 개발계획에 포함되었다. 장위동 일대가 지역 발전과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로 들썩였다. 장위2동 끝자락인 우리 골목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편으론 어차피 건설업자와 부동산업자 같은 장사꾼들의 배만 불리고 집 하나만 갖고 있던 이곳의 원주민들은 다 쫓겨나게 될 거라는 우려도 만만치 않았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와중에도 바로 건너편 월곡이 아파트와 상가들로 새롭고 편리해지는 만큼 장위동의 주택과 골목들은 낡고 불편해지고 있었다.


*장위동 일대는 2005년 9월 서울시 뉴타운 3차지정을 통해 후보지로 선정되었는데, 당시 함께 지정된 11개 지역 중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중략) 2005년 12월 서울시 고시 제2005-405호에 따라 장위동 68-8번지 일대 185만1,020제곱미터 지역이 뉴타운으로 지정되었다. 장위뉴타운은 주거중심형 뉴타운을 골자로 하여 21세기형 강북모델마을로 조성하고자 기획되었다. (중략) 이 과정에서 장위재정비촉진지구는 15개구역으로 나뉘게 된다. (중략)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경기가 주춤하면서 장위뉴타운 사업도 지연되기 시작하였다. 장위뉴타운 선정이후 거의 모든 재개발 구역들에서 민사 및 행정소송이 전개되었다.
『장위동, 도시주거변천의 파노라마』, 서울역사박물관, 2020.*


2007년에는 월곡역과 내부순환로 사이에 대형 주상복합 월곡코업스타클래스가 요란한 광고와 함께 공사를 시작했다. 그 주변에서도 앞서거니 둣서거니 주상복합 빌딩, 복합상가빌딩 등 공사에 가세했다. 장석월에서 가장 높고 매끈하게 뻗은 빌딩, 월곡코업스타클래스의 완공 그리고 홈플러스와 스타벅스의 입점.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2000년대 장석월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어쩌면 대다수가 원하는 것은 깔끔함과 편리함으로 무장한 아파트와 프랜차이즈 상점들, 더불어 새로운 주민센터와 도서관, 보건소 빌딩과 같은 공공시설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더해진 월곡의 모습인지도 몰랐다.

20210509_174236.jpg
20210509_174239.jpg
20190803172244_Prr6mcbcAmFN1D3Wb5.jfif
분양가 상한제 시행을 피해 30층 이상 초고층 랜드마크 아파트 분양이 속속 이어지고 있어 수요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분양가 상한제가 본격 시행되면 일반 아파트보다 택지비와 건축비가 많이 드는 초고층 아파트 공급이 줄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건설사들의 밀어내기식 분양이 속속 이어지고 있는 것. (중략)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극동건설=극동건설은 11월초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코업 스타클래스' 120가구를 분양한다. 이 아파트는 지하5층~지상41층으로 건립되는데 아파트는 지상 10~41층에 181~223㎡ 로 120가구 구성되며 오피스텔은 106실이 공급된다. 지하철6호선 월곡역이 직접 연결돼 교통여건이 더욱 좋아진다. 지하1~2층에는 홈플러스가 입점하고 인근에 현대백화점ㆍ신세계백화점이 있어 생활여건이 잘 갖췄다.
출처 : 이해란기자, 주목! 초고층 아파트 분양 활기, 인터넷신문 투데이코리아(http://www.todaykorea.co.kr) 2007년 11월 07일자*


SKM_C300i21110308400_0005_저화질.jpg

* 이 프로젝트는 리서치를 기반으로 생애사와 드로잉을 통해 성북의 장위동 일대 지역의 미시사를 기록한 작업입니다. 2021년 성북문화재단 예술순환로 성북오픈리서치랩의 소주제연구 지원을 받았습니다.

keyword
이전 03화1990년대, 공사공사, 공사가 일상이던 서울변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