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반재개발주의자 아버지
유영하던 개인주의자 딸

살다. 기억하다. 나누다.

by 문성 moon song

2010년대를 보내며 장위, 석관, 월곡은 언덕과 도로, 건물, 나무와 같은 지형지물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 그곳을 오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장석월을 완성해왔다는 것을. 사람들은 바뀌는 도로와 건물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방식대로 채워나가며 표정을 더했다. 서로 갈등하기도 하고 다른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며 장석월의 풍경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가고 있었다. 그 속을 다만 유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 역시 그 풍경을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의 한 명이었다. 나는 내 존재가 장석월의 풍경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아주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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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초반의 나는 여전히 매일같이 장석월을 나서고 돌아왔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일을 했고 그 틈틈이 근처에 있는 도서관이나 카페를 찾아 내 작업을 이어갔다. 집에 돌아와서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일상을 챙기며 쉬거나 동네를 산책하며 머리를 식혔다. 내 일과는 장석월 안과 밖으로 나뉘었지만 결국 어디서든 내 공간을 만들기보단 사람들이 함께 쓰는 공간을 얼마간 공유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었다.

언니들은 모두 집을 떠났다. 월곡, 돈암, 삼선동,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각자의 집이 생기자 장위동 우리집에는 엄마아빠와 나, 셋만 남았다. 언니들의 독립을 보며 나 역시 독립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돈암동에서 1년 넘게 혼자 살아보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장위동으로 돌아왔다. 시간과 돈 중에 시간을 택했고 최소한의 돈을 벌면서 그 돈을 공간을 만들기 위해 쓰는 것보다는 작업과 활동에 쓰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고령에 여기저기 아픈 엄마아빠 두 분만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끝끝내 마음이 걸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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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장석월 전경, 서울특별시


내가 10대 때부터 병치레가 잦았던 엄마는 2010년대를 넘어서는 온갖 병명으로 병원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래도 취미활동을 놓지 않았던 엄마는 어느 날 성북실버합창단 연습에서 돌아오다 길을 잃었다. 알츠하이머였다. 버스를 타고 나서야 하는 활동들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동네, 우리골목, 엄마의 세계는 점점 좁아져 결국 집과 아빠, 요양사님들이 전부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아빠는 아파트 같은 편한 곳으로 이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집이 낡아 누수나 보일러 고장같은 말썽을 일으키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음에도. 떠난다는 생각 자체를 꿈에도 떠올려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우리집, 좁은 골목, 재개발대상이 된 동네는 엄마아빠의 삶 자체였다.

언제부터였을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엄마아빠는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이곳에서 살터였다. 엄마의 알츠하이머 때문에라도 더더욱. 나는 엄마 곁에서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두 사람을 그리고 이곳 장석월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엄마가 다니던 집 근처의 데이케어센터에는 엄마처럼 고령에 지병을 가진 분들이 많았다. 엄마를 돌보러 오시던 요양사님들도 우리집 외에도 다른 집에 출근을 하신다며 장석월에는 우리 엄마아빠와 같은 많은 노인분들이 사신다고 했다. 아빠는 동네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같이 차를 마시거나 점심에 반주를 걸치시곤 했다. 우리 골목 분들뿐만 아니라 다른 골목 분들도 수시로 드나들었기에 대문은 늘 열려 있었고 거실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나 다름없었다.

아빠와 동네분들은 지붕 방수나 보일러 공사, 페인트칠 같은 보수 공사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고 서로의 집안일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슈는 재개발이었다. 대부분이 엄마아빠와 마찬가지로 삼사십년이 넘는 시간을 이 동네에서 살아오신 분들이었기에 그들도 우리집처럼 이삼층짜리 다세대주택에 세를 주거나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그분들은 여기 장위동이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고부터는 새로이 집을 짓지 않아 동네는 더 노후화되고 옷을 만드는 공장이나 외국인노동자들이 주로 세를 든다고 했다. 그들 말처럼 우리 옆집 지하에 미싱공장이 들어와 있었고 앞집 옥탑방에는 방글라데시 가족이, 우리집 지층에는 베트남 청년이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우리집을 포함한 장위동15구역에는 재개발 추진위원회 두 개가 세워졌고 각각 집집마다 방문해 동의서를 받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동의서를 건네며 이런 이야기를 했다더라 저런 이야기를 했다더라 소문이 돌며 어느 추진위원회를 선택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경쟁적으로 서로를 비방하는 자보가 골목길 담벼락마다 나붙을 무렵, 아빠는 불콰하게 술이 오른 얼굴로 집에 돌아와 재개발 반대모임을 시작했노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내놓은 재개발 출구전략으로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는 주민들이 일정수 이상 해제신청을 하면 재개발지정을 해제할 수 있다는 발표와 더불어 우리동네 역시 반대하는 이들이 모이고 있었다. 우리집에는 더더욱 사람들이 모여들어 머리를 맞대고 재개발해제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논의했다.

KakaoTalk_20211009_210426757_02.jpg 장위15구역 재개발 반대 모임의 주민호소문1 장위15구역 재개발 반대 모임의 주민호소문2



어느 날 아빠는 집을 나서는 날 불러세우더니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돋보기를 쓰고 한 자 한 자 떨리는 손으로 써내려갔을 게 분명한 흔들리는 글씨에 받아들긴 했지만 마뜩치 않았다. 옛 맞춤법으로 쓴 감정적인 호소문으로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까 싶었다. 맞춤법을 고치고 문장을 다듬어 타이핑한 다음 아빠에게 돌려주면서도 나는 회의적이었다. 아파트에서 좀 더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사람들 혹은 다른 사람들이 재개발로 이득을 본 것처럼 자신도 이득을 보고 싶다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인쇄해준 종이를 소중히 들고가 몇 백장으로 복사해 사람들과 나누어 집집마다 돌리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과연 저 노력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빠는 몇 번이고 종이를 내밀었고 나는 계속 마뜩치 않아 하면서도 맞춤법을 고치고 문장을 다듬어주었다. 재개발해제 인원을 모으지 못해 실망하게 될 것을 걱정하면서도 아빠가 이곳을 살아온 장본인으로서 사람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는 걸 지지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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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위15구역 골목길 전경 장위15구역 골목길 전경



아빠가 그렇게 자신의 방식대로 이곳을 살아내는 동안 나 역시 나의 방식대로 이곳을 살아내고 있었다. 처음으로 시작한 창작작업은 계획했던 것보다 시간을 잡아먹었고 나는 프리랜서로 일을 하거나 엄마를 돌보는 시간 외에는 혼자였다. 언니들도 직장과 육아, 살림으로 바빴고 동네 친구들도 대부분 결혼해 직장 근처나 서울 근교로 옮겨가 동네에서도 혼자가 되었다. 나는 어슬렁거리며 새롭게 생긴 카페들을 섭렵하고 식당, 상점 등 동네 구석구석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장위동 끝자락에 있는 우리 골목에서 도로 하나만 건너 월곡으로 가면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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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위동에서 월곡동으로 넘어와 월곡역까지 이어지는 월곡동 언덕길 풍경 동덕여대 후문 주변 유동인구의 증가에 이어진 가게들의 증가 동덕여대 후분 주변 여대앞의 특성을 보여주는 아기


동아아파트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월곡동의 아파트상가와 상점들은 주상복합과 대형마트가 생기고는 더 번화해졌다. 동덕여대와 월곡역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식당과 카페들이 생겨나고 프랜차이즈들도 속속 들어섰다. 여기에 더해 동덕여대에서 새로이 건물을 짓고 캠퍼스를 정비하고는 후문으로 다니는 학생들을 따라 카페와 레스토랑, 케이크샵과 술집들이 순식간에 생겨났다. 마치 물길이 바뀌자마자 그 물길을 따라 풀과 나무가 자라고 풍경이 바뀌듯 사람들의 발길이 주변의 풍경과 분위기를 빠르게 바꾸고 있었다. 저녁에는 아파트주민들, 동덕여대생들뿐만 아니라 길 건너 키스트, 멀리 한예종, 고려대 학생들까지도 모여들었다. 월곡동도 이제는 낯선 이들로 붐비는, 옆자리에 누가 앉든 말든 각자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는 익명화된 공간이 되고 있었다. 그게 오히려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었기에 나는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월곡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힘들게 첫 번째 창작작업을 마무리하고 나자 내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함께 나누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되며 전시, 예술프로그램 기획, 문화예술 조사연구 등으로 일을 확장하게 되었다. 아이디어를 기획안으로 다듬고 사람들을 만나서 협업을 하며 자연스레 그들의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대부분이 합정, 망원, 연남동 언저리 오래된 주택가였고 나는 우리동네 같은 편안함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그 동네들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임대료가 올라가고 결국은 프랜차이즈가 들어와 작은 상점, 공방, 문화예술 공간들이 쫓겨나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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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위동일대 재개발 현장, 성북구청 제공, 성북마을아카이브


우리 동네 주변 역시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한예종 좌우로 허허벌판이 되었다가 아파트가 세워지고 다음으로는 장위3동, 장위2동 재개발 구역들이 빠르게 허허벌판으로 바뀌었다. 월곡동부터 석관동까지 경사진 사면에 걸쳐 자리 잡은 장위동에서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우리집까지도 공사장의 포성이 들렸다. 공사트럭의 행렬과 공사장의 소음, 먼지들이 수시로 우리 골목까지 밀려들었다. 우리 동네 집들은 모두 비슷한 높이였기에 옥상에 오르면 도봉산, 불암산까지도 한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풍광을 자랑했지만 올라가는 아파트들이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턱밑까지 조여드는 듯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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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지역으로 확정된 장위시장의 일부분, 재개발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이미 철거가 완료되고 가림막만 남아있는 풍경. 재개발지역으로 확정된 장위시장의 일부분



장석월 안이든 밖이든 극단적인 속도로 바뀌는 걸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박근혜대통령의 탄핵안이 인용되는 것도 5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이 연설을 하는 것도 광장에서 지켜보았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며 거버넌스 사업으로 일을 확장했다. 성북, 중랑, 서울시의 프로젝트에 참여해 예술프로그램을 만들고 성북청년정책네트워크,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청년의회의 문화예술분과 활동을 했다.


*제6차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2018.5.2.)에서 성북구 장위15구역 외 1개소 정비구역등 직권해제(안)에 대해 “원안 가결” 했다. 이번에 직권해제 대상구역으로 결정된 성북구 장위15구역 외 1개소는「서울특별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조례」제4조의3(직권해제 등) 제3항 제4호에 따라 단계별로 사업이 지연되고 구역 내 토지 등 소유자 1/3이상이 해제를 요청한 경우로써 주민의견조사 결과 사업찬성자가 50%미만인 경우에 해당되어 시장이 직권으로 해제하는 구역이다.

출처: 서울로컬뉴스, 장위15구역 외 1개소 정비구역등 직권해제, 2018년 05월 03일자*


그 와중에 우리동네 장위15구역의 재개발 지정 해제 소식이 전해졌다. 아빠를 비롯해 재개발 반대 주민모임에서 갖은 노력으로 모은 서명서가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해제 소식을 전하며 기뻐하는 아빠를 앞에 두고 만감이 교차했다. 우선은 안심이 되었다. 아빠처럼 반대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음에도 나 역시 우리집, 이 골목, 이 동네에 애착을 갖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대부분이 고령에 편치 않은 몸임에도 열심히 사람들을 모은 아빠와 재개발 반대 주민모임 사람들에게 고맙고도 미안했다. 내가 도와준 성명서와 호소문들이 조금이나마 역할을 한 것 같아 기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노후화되는 이곳이 여전히 걱정이었다. 재개발을 해제한다 해도,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지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장석월의 2010년대가 지나고 있었다.


* 이 프로젝트는 리서치를 기반으로 생애사와 드로잉을 통해 성북의 장위동 일대 지역의 미시사를 기록한 작업입니다. 2021년 성북문화재단 예술순환로 성북오픈리서치랩의 소주제연구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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