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기억하다. 나누다.
나의 2020년은 코로나19와 함께 홍콩에서 시작되었다. 구정 설 전후로 몇 주를 계획했던 여행은 중국 본토 선진에서 폭발한 코로나 19가 홍콩까지 확산되며 끝났다. 공항으로 떠나던 날 사스와 메르스로 단련된 홍콩 현지인들이 새벽같이 약국 앞에 줄을 서 마스크를 사려고 기다리던 풍경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난생 처음 본 그 풍경을 얼마 후 우리동네에서도 보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대구에서 또 서울에서 확진자가 폭증할 때마다 거리두기는 자꾸만 연장되고 프리랜서로 이어가던 일들은 하나씩 중단되거나 기약없이 미뤄졌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는 게 익숙해지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연장되는 날들이 이어지며 나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하릴없이 집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늘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내 그곳에서 몇 시간 머물다 다른 곳으로 떠나곤 했다. 프리랜서로 떠돌며 일을 할 때도 틈틈이 여행을 떠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지역 특유의 모습을 간직한 그래서 그 지역의 과거를 느낄 수 있는 곳. 그곳의 사람들도 편안하게 즐기는 그래서 나 역시 들어가 앉아도 불편하지 않은 곳. 나는 늘 그런 곳을 찾아 헤맸고 혹 발견하면 기뻐하며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작업을 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이따금 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결국 어디든 그곳 특유의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곳에 또 그곳을 자신들의 방식대로 가꾸며 과거와 미래를 이어가는 그 지역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는 나를 깨달았다.
우리동네도 마찬가지였다. 마당에 작은 텃밭이 있고 옥상에선 서울 북동부의 산줄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붉은 벽돌집. 담을 타고 넘어온 담쟁이덩굴과 나뭇가지들로 지나온 시간이 느껴지는 주택들과 골목길. 함께 골목길 눈을 치우고 꽃을 피우고 텃밭의 채소를 나누는 사람들. 여행길에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골목길이나 일을 하다말고 머물러 한숨을 돌리던 동네와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도 이곳만의 특별함이 있고 어디도 이곳을 대체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레 자각했다. 그러자 내가 기쁘게 머물렀던 다른 곳들만큼 이곳에서도 기쁘게 머물고 싶었다. 이곳을 더더욱 소중히 가꾸고 싶어졌다.
달리 말하면 애틋함인지도 몰랐다. 일하며 떠돌던 서울의 소위 뜨는 동네들에서 사라지던 골목길과 주택들. 지역을 여행하며 마주했던 철거된 집들과 새롭게 올라가던 아파트들. 심지어 해외에서도 전통가옥들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올라가던 빌딩들. 곳곳에서 또 다른 장석월들을 발견했었다. 정부의 정책과 거대자본의 흐름에 휩쓸리듯 급변하는 지역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던 지역 사람들.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라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나는 아빠가 인터넷에 매물로 올려달라고 부탁한 지층 전세방을 고쳐 살기로 마음먹었다. 베트남 청년이 살다가 나간 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방이었다. 재개발이 해제되고도 낡고 보수할 곳이 많은 이 집에 들어오려 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아빠와 정식으로 세입자로 계약을 맺고 인테리어를 바꾸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친구의 도움으로 직접 벽지와 장판을 벗겨내고 곰팡이를 제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공간을 조금씩 바꾸어나갔다.
낡은 주택도 정성을 쏟는 만큼 새로워지고 쾌적해질 수 있다는 게 기뻤다. 내 손길이 닿은 구석구석이 사랑스러웠다. 잠에서 깰 때마다 이곳을 조금 더 아끼게 됐고 잠들 때마다 이곳에 조금 더 감사하게 됐다. 나는 길을 따라 달라지는 동네의 풍경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걷기 시작했다. 골목 끝 도로 건너 새로 생긴 동네카페의 단골이 되었다. 월곡동 끝자락 창조인빌에 예술인 친구가 이사오면서 장위동 끝자락 우리집까지 길을 따라 오가며 함께 수다를 떨었다. 종종 혼자 산책을 하곤 했다. 벚꽃이 흩날리는 천장산 산책길, 녹음이 짙어가는 오동산 근린공원, 낙엽이 흩날리는 월곡천, 눈내리는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며 일년을 보냈다.
2021년 초 대법원에서 장위15구역 재개발 해제를 무효라 판결했다. 주민의견조사 과정에서 주민의견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빠는 재개발 해제 선언 무효 소식을 전하고는 말을 아꼈다. 다시 동네사람들이 우리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재개발을 반대하던 이들도 재개발을 찬성하는 이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 누구도 어느 것이 더 나은 선택이 될 것인지 섣불리 말하지 못했다. 조합추진위원회는 다시 조합설립 동의서를 모으기 시작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로주택정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조합을 설립해 공사를 추진하고 있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시절 ‘뉴타운 출구전략’에 따라 재개발 구역에서 해제됐던 서울 성북구 장위뉴타운 15구역에 3200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설 수 있게 됐다. 조합설립추진위원회가 서울시를 상대로 낸 구역해제 무효소송에서 승소가 확정되면서 사업 재추진 길이 열렸다.
장위15구역 재개발, 3년 만에 다시 추진된다, 신연수기자, 한국경제신문, 2021년 01일 15일자*
노후화된 주택들와 골목은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바뀌게 될 터였다. 50년대 장위동에 단독주택들이 들어서고 90년대 월곡동 산동네를 밀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2000년대 석관동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2020년대 다시 장위동으로 그 차례가 돌아온 셈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바뀌게 될지는 몰라도. 문득 깨달음이 엄습했다. 지금껏 내가 보아온 풍경들 그리고 그 속에서 경험한 것들이 재개발과 함께 영영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지도 몰랐다.
예술순환로 오픈리서치랩의 소주제연구를 알리는 웹포스터를 본 것은 5월이었다. 지역을 기록하고 기억할 방법을 묻는다는 글귀에 이곳에서의 시간들을 기록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나고 자라 살아온 이곳을 기록하고 나눔으로써 사람들과 함께 기억하고 싶었다. 더불어 나와 같은 작업에 관심을 갖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연구에 참여하게 되면서 연구자마다 다양한 관심사를 갖고 있고 동네쌀롱제라는 예술작업도 성북학이라는 지역연구도 진행되어왔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곳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무색했다. 지금껏 알지 못한 채 지나왔을 다른 이들의 작업들을 짐작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기록이 다른 이들에게 가닿을 수 있을지,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지 자문하면서도 이곳 장석월에서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8월 동네쌀롱제에서 연락이 왔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서 이곳의 이야기를 해달라는 제안이었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동네에서 예술실험프로젝트를 진행할 작가들과 만난 자리에서 8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우리집이 있는 장위동을 중심으로 석관동과 월곡동에 대한 나의 기억들을 풀어놓았다. 아빠의 재개발 반대 활동을 듣고 누군가가 물었다. 오래된 주택가를 지키는 것을 미화할 필요가 있는가. 꼭 반대를 해야만 하는가. 낡고 불편한 주택에서 사는 것보다 많은 이들이 쾌적하게 살 수 있는 고층아파트가 더 나은 것이 아닌가. 그는 재개발을 반대하는 이들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아빠의 떨리는 글씨가 적힌 종이를 받아들며 못마땅해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미 재개발해제 무효소송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재개발을 논의중이고 결국 소유권을 가진 주민들의 동의 여부에 따라 재개발 여부도 결정되리라는 것 외에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자리가 끝나고도 나를 따라왔다. 왜 굳이 오래되고 낡은 이 집에서 살고 있는지 나에게 묻고 있었다.
답은 분명했다. 모든 것을 부수고 모두가 동일한 규격 안에서 사는 걸 선택하고 싶지도 않았고 선택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새로이 짓는다 해도 시간과 함께 낡고 닳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래된 것들을 부수거나 없애는 편이 아니라 문제가 되는 부분을 고쳐가며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에 새로운 감각을 더해 나에게 맞게 만들어가고 싶었다. 그게 더 즐겁게 그리고 이곳에 더 알맞게 여겨졌다. 지금도 그렇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갈 뿐이다. 물론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재개발 논의가 다시 급물살을 탈 수도 있다. 이곳을 한꺼번에 부수고 대규모의 아파트가 들어서게 될 수도 있다.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다.
* 이 프로젝트는 리서치를 기반으로 생애사와 드로잉을 통해 성북의 장위동 일대 지역의 미시사를 기록한 작업입니다. 2021년 성북문화재단 예술순환로 성북오픈리서치랩의 소주제연구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