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위해서 찍어두었던 사진들을 올리고 다시 한번 훑어보며 마음이 복잡해진다. 아빠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먹는 것을 그것도 잘 먹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내가 이상하다. 한편으론 여름과 가을 음식과 함께 지나온 시간들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인다. 눈물까지 고일 일인가. 그렇다. 적어도 나에겐. 생각한다. 아마도 음식을 정성껏 차리고 먹는 것이 나 자신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가장 애정 어린 행동인지도 모른다. 복잡한 마음을 내리누르고 다시 사진들을 분류하고 이야기의 갈피를 잡아본다. 나 자신을 돌보는 너그러움을 스스로에게 허락하고 싶어서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밥 먹었냐는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싶어서.
1. 미니멀식생활 실험 2년 차 여름, 식단 돌아보기: 혼밥러에서 메이트로
파란만장한 여름과 가을이었다. 직업적인 향방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있던 나는 변화에 몸을 맡기기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변화를 만들어보기로 했고 여러 가지 활동, 여행, 한 달 살기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일상에도 변화를 시도해 보려던 차에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며 모든 것이 멈추었다. 파란만장한 날들은 내 끼니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메뉴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봄부터 시도한 소분과 밀프렙은 단백질과 계절야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여름야채는 저렴하고 다양했지만 문제는 하나두 개만 사는 것보다는 묶음으로 사는 게 절대적으로 저렴했다. 당연히 소분과 밀프렙을 해두는 것이 관건이었다. 오버나잇오트로 과일과 오트, 요구르트 혹은 샐러드와 빵으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점심에는 한 번에 야채를 여러 개 사서 일주일치를 나누어 소분해 둔 야채를 기본으로 샐러드를 먹었다. 다행히 날이 더워질수록 샐러드에 단백질을 더해 먹는 게 입에도 잘 맞았기에 매일 하나씩 꺼내 여러 가지 야채를 섞어보거나 훈제오리나 닭고기, 달걀로 단백질의 종류도 달리하고 소스를 바꿔보기도 하며 한 끼는 야채를 넉넉히 먹었다. 저녁에는 물리지 않도록 같은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다르지만 간단한 - 10분 안에 마무리할 수 있는- 레시피를 찾아 덮밥이나 파스타를 만들었다. 누가 한국인 아니랄까 봐 적어도 한 끼는 밥을 먹거나 면을 먹지 않으면 포만감이나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는 나.
한여름 무작정 지원한 문화예술기획자로 괴산 한 달 살기를 시작하며 내 식단의 메뉴가 달라졌다. 가장 큰 이유는, 지원자들과 함께 읍내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진 장연이라는 곳에서 숙소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중학교에 딸린 관사였다는 숙소는 3호실로 나뉘어 각 호실마다 2명이 방 두 칸에 부엌과 욕실, 거실이 딸린 아담한 공간을 쓰게 되었다. 배정을 받은 첫날부터 읍내로 나가서 식재료를 사야 했기에 자연스레 주방과 거실, 냉장고를 공유하게 된 메이트와 의논을 해서 장을 보았고 서로 배려하며 호불호가 없는 혹은 둘 다 맛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재료들을 우선으로 고르게 되었다.
우리는 아침에는 달걀이나 토마토, 당근 같은 재료로 만든 간단한 샐러드를 곁들이고 각자 괴산의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을 지켜보거나 참여하고 돌아와서는 햇반과 찌개 혹은 고기를 구워 숙소에 딸린 작은 텃밭의 야채들 더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식재료들 그리고 음식들이 더해졌다. 참여했던 곳의 선생님들이 먹어보라며 건네주신 찐 옥수수, 풋고추, 상추, 감자전, 짜장면, 과일들…, 우리의 식탁은 늘 풍성했고 냉장고에는 계속해서 괴산의 여름 특산물이라는 대학 찰옥수수 그리고 괴산 막걸리가 들어 있었다.
매일같이 갱신되는 습도와 폭염에 지쳐 숙소에 돌아오면 메이트와 손발을 맞춰 음식을 준비했다. 어차피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들은 일과가 끝나고 잠시 들릴 수 있는 읍내의 마트 그리고 저녁이 되면 문을 닫아 갈 수 없는 장연의 하나로마트뿐이었기에 재료도 공산품도 한정적이었기에 있는 재료들로 나누어먹는 것이 최선이기도 했다. 우리는 마치 보급을 받는 고립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처럼 함께 무엇을 먹을지에 열을 올렸고 이따금 옆방, 그 옆방까지 모두 모여 상은 더욱 풍성해지고 그럴 때면 당연히 술도 빠지지 않았다.
일인 가구의 간단한 식사는 메이트와 한 달 살기 동기들과 하는 한 여름밤의 잔치가 되고 있었다. 매일의 식사를 함께하는 만큼 다정해지고 서로의 저녁과 아침을 그렇게 서로를 살뜰히 살피고 챙기는 사람들 속에서 '식구'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했다. 한 달이라는 한정된 기간이 줄어들수록 야채를 조금 더 단백질을 조금 더 챙겨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매 끼니를 함께 즐겨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역시나 누가 한국인 아니랄까 봐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 한 두 끼니만 지나도 밥과 김치 그리고 라면을 포기하지 못했다.
2. 여름 식생활의 일부, 여행과 한 달 살기 중 외식메뉴 돌아보기: 새로운 지역, 새로운 경험
여름 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당연히 식생활에서 외식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사진을 다시 살펴보며 나의 외식메뉴에는 미니멀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어렵겠다 싶다. 식탐도 많고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고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도 강한 편이라 타지에 가면 그 지역의 음식을 먹어보는 걸 큰 즐거움으로 삼아온 탓이다.
그래도 외식을 하면서 식당과 메뉴를 고를 때, 미니멀 식생활을 추구하고자 하는 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긴 했다. 이를 테면, 프랜차이즈는 제외할 것.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운영한 식당 그중에서도대형화되어 대형버스단체손님을 받는 식당보다는 현지인들이 주로 가는 식당을 택할 것. 지역의 특산물이나 지역에서 난 식재료들을 주로 다루는 메뉴를 고를 것. 과한 특선메뉴나 요리보다는 한 끼 식사에 적당한소박한 메뉴를 고를 것. 욕심내 지나친 양을시키지 않고 인원수에 맞게 시켜서 가급적음식을 남기지 않을 것.
그렇게 고른 식당들은 대체로 만족스러웠고 늘 작은 밑반찬까지도 넉넉히 준비해 주셨기에 평상시보다 많은 양을 먹게 되곤 했다. 모아둔 사진을 보며 식사를 하던 그 순간들이 떠오른다. 신선한 야채가 듬뿍 든 갓쪄낸 만두와 손수 뽑은 막국수에 곁들인 독특한 깊은 맛이 나는 육수에 감탄하고 대형식당을 피해 들어간 고깃집에서 다채로운 밑반찬에 밥을 두 공기나 해치우고, 동네주민들의 식사시간에 맞춰 점심과 저녁에 문을 여는 백반집에 마주한 황태구이와 황탯국에 음미하느라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일행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그윽한 차향을 맡으며 산자락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던 순간들.
한 달 살기 중에도 실습지에서 선생님들과 함께 한 끼는 밖에서 먹을 수밖에 없었고 중간중간 행사나 모임에 참여하면 자연스레 저녁식사도 함께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기에 외식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선택하게 되기보다는 정해진 메뉴 혹은 모두가 선호하는 메뉴를 고르게 되긴 했지만 다행히 괴산에서 만난 선생님들과 동기들과 함께한 메뉴는 모두 괴산의 오래된 식당 백반 메뉴이거나 괴산의 식재료로 정성껏 만든 것들이었기에 내가 외식에서 고려하곤 했던 기준들로도 충분히 훌륭한 것들이었다.
덕분에 충북 그리고 괴산의 식재료와 식문화를 좀 더 경험할 수 있었고 식재료를 바라보는 나의 눈도 그만큼 넓어질 수 있었다. 충북에서는 고기를 슴덩슴덩 썰어 넣어 바싹 끌인 짜글이를 많이 먹는다는 것도, 괴산이 우리나라 대두 최대 생산지라는 것도, 당연히 두부가 그리고 여름콩국수와 콩물이 별미라는 것도, 강원도 다음의 준고랭지에 산이 높아 각종 나물 그리고 버섯도 유명하고 나물무침과 버섯찌개는 읍내 백반집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도, 산이 높은 만큼 계곡도 깊고 물이 맑아 민물고기와 다슬기도 많이 나고 다슬기무침, 올갱이국, 다슬기전도 여름 별미로 친다는 것도, 대학 찰옥수수, 고추, 배추가 전국에 택배로 팔려나가고 가장 큰 한살림과 자연드림 등 유기농조직이 활발히 활동하고 그 수확물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도.
재래시장 안에 있던 흑태와 백태를 섞어 간 콩국수 그리고 괴산에서 나는 식재료만으로 주별로 메뉴를 바꿔가며 양식으로 재해석해 내놓는 청년들의 식당에서 맛본 가지와 토마토덮밥, 100년이 넘은 양조장의 가업을 잇고자 고향에 돌아와 빚은 막걸리…, 재료 본연의 맛 그리고 그 맛을 최대한 끌어올려 맛보게 해주는 요리는 낡은 문지방도 시장모퉁이 구석도 즐겁게 만드는 감동이 있었다.
그리고 괴산에서의 한달살이 동안 여러 곳에 초대를 받았고 초대를 받을 때마다 정성이 담긴 음식으로 환대를 받았다. 귀향을 하신 분들도 귀촌을 하신 분들도 많았고 각자 자신의 텃밭에서 혹은 지인을 통해 갓 수확한 재료들로 직접 만든 음식을 내어주셨다. 텃밭에서 딴 가지 그라탱과 곱게 간 콩국수에 갖가지 허브를 잘 섞어 깜짝 놀랄 만큼 진하고도 향긋한 차. 괴산의 밀가루로 만든 빵과 마리네이드 한 양배추와 당근, 갖가지 과일로 담근 새콤달콤한 과일청. 매일 아침 괴산의 밀가루로 만든 식빵과 복분자로 만든 에이드.
무엇보다 그 음식들을 두고 나누는 인사와 오가는 이야기 속의 경청 그리고 웃음과 어우러진 식사였다. 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하며 들였을 정성이 느껴지는 음식들에 마음이 따듯해지는 그리고 감사한 순간들. 요리와 식사의 과정에서도 새로운 방식과 관점 그리고 교류를 통해 나의 식생활도 그리고 식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점도 확장될 수 있다는 것에도 정말로 기뻤다. 일인가구로 음식을 해 먹으려고 노력해 온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어졌다. 끼니를 고민하고 음식을 차리고 치우는 반복을 해오지 않았더라면 식재료를 고르고 다듬어 음식을 만드는 노고를 그 안에 들어가는 정성을 이렇게 알아차리고 감사하지도 못했으리라. 괴산분들이 직접 키운 식재료들을 건네주실 때 그 마음에 감동하고 고마움을 전할 수도 없었으리라. 한편으로는 음식을 나누는 즐거움을 앞으로도 이어나가야겠다 마음먹었다. 일주일에 두어 번은 외식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건 이전에도 해온 일이었지만 앞으로도 의식적으로 해보아야겠다고.
3. 다시 혼밥러로 돌아온 일상: 냉장고 털기와 공부하기로 이어가는 식생활의 확장
한 달 살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냉장고 털기부터 시작했다. 물론 한 달 살기를 떠날 때 이미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음식-이라기보단 식재료나 저장식품에 가까운 것들-만 남겨둔 상태였지만 그것들도 영원히 그렇게 둘 순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머물며 실감하게 된 것은 계속해서 보관가능한 식재료는 없고 결국에는 버리게 될 확률만 높아진다는 것이었기에. 더불어 야채를 넉넉히 사서 끼니 중 야채와 과일의 비중을 늘려 다시 오버나이트오트밀, 샐러드로 준비도 편하고 식사도 정리도 편한 끼니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야채를 차가운 샐러드로 먹는 것 외에도 다양한 방법을 궁리해보고 싶어 레시피를 검색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알게 된 유튜버들의 재료준비, 밀프렙 등 다양한 방법들을 따라 해보며 그들이 책을 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좀 더 참고해보고 싶어서 책을 빌려보게 되었다. 특히 가장 도움이 되었다고 느꼈던 이들은 유튜버들 중에서도 실제로 식재료를 사서 소분하고 여러 가지 메뉴로 활용하는 노하우를 전하는 "굴즈야 밥묵자", 식재료 중에서도 야채의 비중을 늘리고 맛을 끌어올리는 노하우를 전하는 "홀썸의 집밥예찬", 그리고 간단하면서도 짧은 시간으로 가능한 전자레인지레시피로 여름의 수고를 덜어주는 "따뜻한 여사"였다.
특별한 식사를 위해 한 두 번 하고 마는 요리가 아니라 매일의 끼니로서의 요리, 스스로를 챙기기 위한 식생활의 일부로서 요리를 바라보게 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내가 좋아하는 메뉴를 건강을 위한 균형 잡힌 식단으로 구성하되 맛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식재료구입과 손질, 요리, 뒷정리까지 반복적인 노동을 효율적으로 최소화하려다 보니 무수히 많은 집밥을 해온 이들이 전수하는 노하우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그들의 유튜브 클립과 책을 넘겨보고 더듬더듬 따라 하며 생야채만 먹는 경우도 있지만 간단히 절이거나 버무려서 김치나 피클처럼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당근라페나 아예 오이로 냉국을 만들어서 곁들일 수도 있고 야채를 굽거나 볶아서 따뜻한 샐러드도 만들 수 있다는 것, 혹은 다지거나 갈아서 수프로도 만들 수 있다는 것, 다양한 식재료를 만큼이나 다양한 요리법이 존재한다는 걸 체감하며 나의 식생활은 한 번 더 확장되고 있었다.
내친김에 일인가구를 위한 다양한 강좌들 중에서도 요리강좌들을 몇 가지 신청해 두었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여름보양식강좌까지도 듣게 되었다. 전문가의 설명과 함께 한 조를 이룬 이들과 식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하고 나누어 먹는 신선한 경험에 약재시장과 경동시장에서 보낸 시간은 식재료에 한층 더 관심을 갖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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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늦여름 아빠의 마지막 식사 … 그리고 미떼 한 봉지
그 와중에 아빠는 유독 이번 여름을 힘들게 지나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언니들과 나는 돌아가며 일주일에 한 번씩 주말에 아빠의 일주일치 장을 보고 식사를 했다. 그중에서도 지근거리에서 사는 나는 이따금 본가에 가서 집을 살피고 아빠를 살피곤 했는데 한 달 살기를 떠나기 전 활발하던 아빠는 돌아온 뒤로 유독 기운이 없어 보였다. 매일같이 물을 주고 챙기던 마당에도 잘 내려오지 않고 에어컨과 선풍기를 끼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마음에 걸려서 저녁마다 티브이를 들여다보거나 잠들어있는 아빠를 들여다보곤 했는데 어느 날 요양사님이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는 것 같다고 걱정 어린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병원에도 다녀왔고 약도 먹었다고 했는데 자리를 보전하는 아빠가 이상했다. 또래에 비해 건강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입맛이 없더라고 허기를 참지 않고 끼니를 챙기며 스스로도 건강을 챙기던 사람이었는데, 어제저녁도 오늘 아침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고 했다. 너무 이상해서 언니들에게 알리고 상을 차리고 마주 앉아 아빠가 끝까지 먹는 걸 지켜보았다. 근처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돌아와 그렇게 나도 언니들도 돌아가며 아빠에게 보양식을 챙겨드리고 약을 먹는 것도 확인하고 잠자리에 드는 걸 지켜보기를 며칠 째. 점점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시더니 열이 나기 시작했고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하셨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며 응급실을 찾은 그날로부터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아빠는 돌아가셨다. 노인성폐렴이라 했다. 증상이 거의 드러나지 않아서 심각해진 이후에야 알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이미 심각해진 상황이라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며 연명치료의 가부를 결정하라는 순간 오래전부터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밝혀온 아빠는 링거수액도 산소호흡기도 떼고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생사와 싸우는 아빠 곁에서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가장 마음을 후벼 팠던 건 아빠에게 음식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꾸만 집에 가겠다는 아빠에게 지금 심각한 상황이라고 우리도 아빠를 괴롭히고 싶어서가 아니라고 조금만 힘내라고 이건 연명치료가 아닌 최소한의 조치라고 설명에 설명을 더하고 나서는 잠시 차분해지시는가 싶더니 물도 식사도 드시고 싶다 하셨다. 병실침대에 누워 식사를 하는 건 이미 감염된 폐와 호흡기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금식하라고 했다는 말에 아빠는 기어이 화가 폭발했다. 어째서 여기에 갇혀 고픈 배도 채우지 못하느냐는 말은 열과 산소호흡기로 흐려진 와중에도 또렷했다. 물 적신 거즈를 주는 냉정한 간호사에게 견디다 못해 물을 마시는 걸 허락받고 간호사들과 의사 몰래 아빠가 찾는 두유나 우유를 드리는 건 안될까 열이 올랐다 내려가고 석션을 하고 호흡기의 위치를 바꾸면서 아빠가 달고 있는 요동치는 각종 기계의 그래프 속에서 하루에도 수천번씩 고민했다.
차라리 빨리 가고 싶다고 너무나 힘들다는 말을 되뇌다가 반짝 다시 의식이 맑아지면 빵이랑 우유라도 달라고 하는 호소를 들으면서도 고민하며 지켜보아야 하는 게 아빠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몰래 빵조각과 우유를 건네줄까 그런데 그것들이 아빠의 기도를 막으면 그것으로 곧바로 아빠를 떠나게 만들면, 아니면 이대로 아빠가 계속해서 호흡이 약해지는 순간을 지켜보아야만 한다면, 고민이 계속해서 부딪히고 흩어지는 와중에 아빠는 계속해서 기력을 잃고 있었다. 의사도 간호사도 어느 순간부터 지켜보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며 들여다보고 가버리기를 반복하더니 잠시 집에 돌아간 한밤중에 긴급호출을 했다.
오늘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으니, 돌아오라는 말을 채 다 듣기도 전에 나는 알겠다고 지금 간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택시를 타고 당도한 병실에서 아빠는 이제 빨리 떠나고 싶다고 했다. 희미해지는 의식을 붙잡고 이어나가는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목을 축이게 해주는 것 외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날 아침 아빠는 떠났다. 병실에서 내내 먹고 싶다고 했던 빵과 우유를 몰래 건네주지 못한 내가 너무나 바보 같았다. 고열과 통증 속에서 허기도 견디라고 했던 의사와 간호사가 원망스러웠다. 번잡스러운 장례절차를 마치고 가족들과 회의를 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하는 와중에도 아빠가 호소하던 허기가 떠올랐다.
아빠의 장례식이 끝나던 날 비가 와서 관측사상 최고의 늦더위라는 여름을 끝냈다. 나는 가을 내 아빠의 유품과 엄마의 유품들까지 고스란히 남은 아빠의 집을 정리했고 종종 마지막으로 차려주었던 아빠의 식사가 떠올랐다. 그래도 당신이 일어나지 못하는 순간에 밥을 차려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요양사님에게 부탁해 이따금 전을 부치거나 국수 같은 별미를 드시던 아빠, 그 음식들을 나누어서 나에게 주려했던 아빠. 고함치고 화를 내는 것엔 익숙해도 애정표현은 거의 하지 않았던 당신의 애정표현이었다. 나도 결국은 당신을 닮아 음식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식을 차리고 먹고 나누는 행위가 주는 온기와 위안을 사랑이 아니면 달리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빠의 물건들을 정리하며 아빠의 마지막 며칠의 허기를 덜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조금은 상쇄할 수 있었지만 내 식생활은 방치하고 있었다. 루틴은 무너졌고 요리도 하지 않았다. 장례식에서 남은 음식을 가져와 꾸역꾸역 처리하듯 먹어치우고는 눈에 띄는 대로 아무거나 허기를 때우고 귀찮으면 그마저도 먹지 않았다. 스스로를 먹이고 챙기는 애정을 줄 수 없었다. 아빠의 허기를 채워주지 못했던 나를 벌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자학이 멈춘 건, 늦가을 낯선 이의 작은 선물 때문이었다. 아빠의 물건들과 더불어 엄마의 물건들까지 정리하면서 폐기하기보다는 기부를 택했고 기부가 되지 않는 물건들은 나눔으로 최대한 버려지지 않도록 애를 쓰고 있는 와중이었다. 아빠가 모아두었던 한국화와 서예 액자들은 표구에 목재프레임으로 마감한 것들이었지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았고 기증은 불가능했고 나눔으로 당근에 올려두어도 가져가겠다는 이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 가져가겠다는 할아버지는 모두 다 황학동에 팔겠다는 야심 찬 욕심을 숨기지 않았고 어느 아저씨는 비 오는 날 무리해서 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바람을 맞혔다 그리고 액자들을 나눔에서 내리려던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지방과 서울을 오가는데 오늘 서울에 올라오는 길에 발견했다며 꼭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시간을 맞춰보더니 집에도 들리지 않고 곧바로 온 아저씨는 액자 하나하나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차에 넣으며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해 주었다.나 역시 물건을 소중히 다루어주는 게 고마워 즐겁게 감상하시면 좋겠다고 고개를 숙이며 돌아섰는데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웠다. 차에 있던 것뿐이라며한사코 쥐어주는 흰 봉투를 결국 들고 들어와 봉투를 열어보니 눈사람 인형들과 함께 미떼 한 봉지가 들어 있었다. 식탁에 올려두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문자가 울렸다. 나눔 정말 감사해요. 따뜻한 차 한잔이라도 하셨으면 해서 보냈어요.
그날 밤 서울은 처음으로 영하로 떨어졌다. 나는 더는 추위를 참지 않고 보일러를 틀고 물을 끓여 낯선 이의 감사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