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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여름의 문턱에서

by 문성 moon song

다시 새로운 여름의 문턱에서 오래된 여름의 기록을 마무리한다. 오래된 여름을 되살릴 수 있었던 건 B4사이즈의 스케치북과 딱 그 절반 크기의 빠레트 그리고 론리플래닛의 시베리안횡단열차가이드북 덕분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터무니 없이 부족한 정보에 애를 먹다가 결국 영어판으로 구입한 가이드북은 그때에도 더없이 유용했지만 다시금 돌아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이드북에 남은 흔적을 더듬으며 흐릿해진 기억의 촛점을 또렷하게 맞출 수 있었다. 스케치북에 남은 그림들은 기억의 순간순간에 색채를 그리고 감각을 더해주었다.
스케치북과 빠레트는 카자흐스탄에 도착해서 산 것이었다. 알마티에서 가장 좋은 마트를 구경삼아 들렀다가 싼 가격에 충동적으로 집어들었다. 사진에는 담을 수 없는 그곳의 색채를 그곳의 분위기를 남기고 싶었더랬다. 하지만 스케치북의 검은색 커버는 튼튼해도 종이는 질이 좋지 않아 물감을 머금으면 금세 우그러졌다. 물감은 색을 섞으면 탁해지기가 일쑤였고 붓도 털이 너무 많이 빠져서 물감과 함께 종이에 엉겨붙곤 했다. 그래도 덕분에 발이 멈추는 곳에서 종이를 펼칠 수 있었다. 그곳을 더욱 섬세한 눈으로 들여다보며 되새김질 할 수 있었다. 여행이 끝나고 십여년이 지나서까지도 그때 그곳에서의 순간순간을 간직하고 되살릴 수 있게 해주었다.
여기에 옮겨 담고 글을 더하며 그 순간순간이 그때 그곳에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 글을 읽은 이들과 그들이 달아준 댓글에. 또 그들이 적어내려간 그들의 순간순간을 읽으며. 그 순간순간이 새로운 순간순간과 겹쳐지고 또 함께 어우러지며 지나간다. 오래된 여름을 보내며 새로운 여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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